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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이정(李楨)과 김인후(金麟厚), 거제도 정황(丁煌)을 방문하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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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인
댓글 1건 조회 367회 작성일 24-05-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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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이정(李楨)과 김인후(金麟厚), 거제도 정황(丁煌)을 방문하다> 고영화(高永和)


 16세기 중기의 사림파는 무오⋅갑자⋅기묘사화를 거치면서 중앙정치세력이 거의 전멸했는데,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뒤 서서히 등용되어 요직에 배치되고 1543년에는 김인후(金麟厚)가 향약시행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1544년에는 조광조의 신원문제가 거론되어 이를 계기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기 시작했으며,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1545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가 아들 경원대군이 12살 어린나이로 즉위(명종)하자, 수렴청정 섭정을 시작하여 외척 정치가 시작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윤원형과 이기(李芑) 세력이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했다. 이후에도 1547년(명종2)에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림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수많은 문신들이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거나, 또는 삭탈관직 당하거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되거나, 사사(賜死)되어 사림(士林) 신진사류에게 참혹한 시련을 안긴 암울한 시대였다. 

 

● 1558년 구암(龜巖) 이정(李楨)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거제도를 방문하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 1558년 늦봄에, 47세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 선생은 남명선생을 따라 두류산을 유람하다 돌아온 후, 거제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친구 유헌(游軒) 정황(丁煌 1512~1560)을 만나기 위해, 그들의 절친선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불러서 함께 찾아간다. 구암은 유헌(游軒)과 친구였고 하서는 이들의 선배 형님 격으로 정신적으로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다. 두 분 선생은 배를 타고, 거제 해변에 있는 수양동 수월사 절에서 정황(丁煌)을 만나 사흘 밤을 같이 지낸 후에, 다시 남해도에 유배된 김계응(김난상 1507~1570)을 방문하려고 바다를 통해 건너갔다.[乘舟往會丁季晦于巨濟海邊蕭寺 宿三夜而別 仍往南海 訪金季應(金鸞祥)] 


 정황(丁煌)은 구암(龜巖)과 같은 해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正字)를 지냈는데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1547년 곤양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제에 이배되어 1560년 적소에서 생을 마친 인물로 구암과 친교가 두터웠다. 또한 정황은 유년기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2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구암은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제자인데, 둘 다 사림에서 성장한 동갑내기 벗이었다. 그리고 만년에는 둘 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종유(從遊)하였다. 그들은 일찍부터 서로 알고지낸 벗이라 그런지 이들의 문집에는 한결같이 서로가 주고받았던 시문들이 많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한편 정황(丁煌)의 유헌집(游軒集)에는 구암(龜巖)과 주고받은 한시(漢詩)가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구암(龜巖)이 보낸 서신에 화답한 시에는 “처녀아이 마음 같이 절절히 그리운 사람”, “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리의 우정”이라고 적고 있으니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절친 사이였는지 알 수 있다.

 정황(丁煌) 선생은 사후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선생께서 청원하여 신원이 회복되었고 선생이 죽은 지 120년 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께서 그 묘에 명(銘)을 지었다. 또 30년 후 1708년에 경연관 신하들의 건의와 청원으로 관작(이조판서)과 시호(忠簡)가 주어졌고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1) 거제해변(巨濟海邊) / 이정(李楨 1512~1571) 

擧頭惟白日 머리를 드니 밝은 해 뿐이고 

開眼只滄波 눈을 뜨니 오직 푸른 물결 밖에 없구나. 

一棹分南北 노(棹) 젖는 바닷물 남북으로 갈라지고 

靑山隔海多 청산에 가로막힌 바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위 시는 1558년 초여름, 이정(李楨)선생이 거제도 견내량에서 사등앞바다를 거쳐 고현만으로 배를 타고 친구를 만나려 가는 길에 지은 시(詩)다. 배 멀미에 잠시 주춤하다 머리를 드니 초여름 하늘에 밝게 떠 있는 태양으로 순간 아찔한 빈혈 증상이 생겨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오로지 푸른 바다 물결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배 사이로 남북으로 갈라지는 바다물결을 한참이나 즐긴 이곳은, 가조도와 성포 사이를 지난 후 10리쯤, 사등면 앞바다였으리라. 그리고 연초면과 칠천도, 고현만이 바다를 턱하니 막고 있는 장면에 감동한 선생은 붓을 들어, 위 시(詩)를 한편 남겼다. 

 이로부터 금세 도착한 거제시 수양동 수월사 절에서 유헌(游軒) 정황(丁熿) 선생은 구암(龜巖)과 하서(河西)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詩 2수를 읊었다.


2) 구암 이정과 하서 김인후와 더불어 같은 운(韻)으로 2수를 짓다.[與李龜巖金河西韻] 1558년(명종13년 戊午) / 정황(丁熿 1512~1560)

其一

多師眞意侵南瘴 뛰어난 스승의 참 뜻을 남쪽 더운 기운이 범하고 

獨踏孤居滿地苔 홀로 걷는 외로운 삶, 대지엔 이끼만 가득하네 

除將黃卷留心外 장수를 제수 받으니 빛바랜 책이 마음 밖에 머무는데 

盡日閒無人事來 진종일 쉴 새 없이 인사하러 오더이다  

其二

師於身世無閒累 스승의 처지(身世)는 목책을 묶진 않았지만 

穿破頭流幾屐苔 지리산 뚫어 다니시면 어찌 나막신에 이끼 낄까?

一宿便回孤棹去 하룻밤 묵고 곧 돌아오니 외로운 배 어이할꼬 

水邊山隮肯重來 물가 산에 올라 애달아 갔다 오네 


3) 구암과 더불어[與龜巖] /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葵花雨裏盡情開 해바라기는 빗속에서도 정을 다해 피었는데 

上下雲煙孰見哉 오르내리는 구름 연기 누가 보아 줄까마는 

已作淫霖思霽日 이미 장마도 개였으면 하는 날,

披簑終夕獨遲回 도롱이를 헤치고 저녁때까지 거닐어 보세나. 


● 앞서 1553년 남명(南冥) 조식(曺植), 거제도에서 유헌(游軒) 정황(丁煌)을 만나다.

 이들보다 앞서 1553년 가을,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김해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 장목면 영등포로 건너와서, 거제시 고현동 유헌(游軒) 정황(丁煌 1512~1560) 선생의 배소로 찾아와 상봉한 후에, 며칠 동안 머물다가 견내량을 거쳐 고성 진주를 경유하여 합천으로 돌아갔다. 5년 후, 1558년에 다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과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 선생이 거제도를 방문한 것이다.

 계축년(癸丑年) 1553년 유헌(游軒) 선생이 그의 나이 42세(四十二歲) 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의한 척신정치의 폐단과 관리들의 부정축재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문하는 격렬한 상소를 작성하였는데, 때마침 합천의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거제도로 찾아왔다가 이를 읽어보고, “귀양살이하는 신세로 이러한 상소문을 올리면 목숨을 보전키 어렵다”며 극구 만류하여 중지하였다. 이후 1555년(乙卯年) 남명 선생은 명종(明宗)이 그를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했던 이른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내용에서, 유헌 정황 선생의 의중을 담아내었다. 명종 왕을 “선왕(중종)의 한 외로운 어린 아들”일 뿐이라고 부르고, 또한 사화(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력 문정왕후를 향해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을묘사직소’에 적고 있다. 이는 정황 선생의 영향을 받은 글로써, 이 얼마나 피맺힌 통분(痛憤)이 컸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4) 남명(南冥)과 유헌(游軒)의 조우(遭遇). 1553년 가을 고현동 / 고영화(高永和)

嶺南形勝優岐城 영남에서 가장 뛰어난 형승을 자랑하는 거제도에,

丈老情意來訪程 어르신이 방문한 정과 뜻을 헤아린다.

盛年官吏往來書 젊은 관리시절부터 서신을 주고받았다지만

相逢一醉豈容輕 서로 만나 한 번 취함을 어찌 가벼이 했으랴.


德業相勸優遊適 유헌 선생이 덕업상권하고 유유자적하며

藏修遊息未歸情 학문에 전력해도 돌아갈 수 없지만,

世事莫論士禍後 참혹한 세상의 사화(士禍)를 더 이상 논하진 말자.

却恐危途觸罻坑 험난한 길에서 그물구덩이에 걸려들까 두렵다.


南冥游軒話所思 남명과 유헌이 서로 속마음을 털어 놓는데

魚肴佳醑樽滿盈 물고기 안주에 좋은 술이 동이에 가득하였다.

敬以直內義方外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바르게 하며

多事禮法實躬行 세상의 여러 일에는 예법이 있으니 올곧게 행동하여야 한다.“


乙巳喪亂幾家門 을사사화 난리 통에 몇 가문이 남았더냐며

戚臣弊端招說明 척신정치 폐단을 지적하고 설명하면서

示意草疏題時弊 유헌 선생이 시폐(時弊)를 쓴 상소를 보여주니

南溟往見說止征 남명 선생이 보고는 힘써말려 그만두었다네.


●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 유교철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널리 알려진 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 경상도에 ‘퇴계(退溪)‘가 있다면 전라도엔 ’하서(河西)‘가 있다할 정도로 유명한 성리학자이자 유교 철학자이다. 그는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노수신(盧守愼)·기대승(奇大升)·정지운·이항(李恒) 등과 사귀었고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 우리나라 성리학 이론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적으로는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이기이원(理氣二元)론의 견해를 취했으며,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李恒)의 태극음양일물설에 반대하고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5) 인생(人生) / 김인후(金麟厚 1510~1560) 

來從何處來 오기는 어디로부터 와서 

去向何處去 가기는 어딜 향해 가는가.

去來無定蹤 오고 감에 일정한 자취 없거늘

悠悠百年計 공연한 백년 계획에 인생만이 아득해라.


 우리 모두는 모진 세상 풍파를 헤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고 가는 것이 일정한 자취가 없는 것’이 인생(人生)이다. 사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에 대해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오래 전부터 이 땅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또한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가는, 뜬 구름 같은 인생이라고 다들 말하기도 하고,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생의 자취가 어디인지 알 수 없거늘, 백년의 장황한 계획만을 늘어놓는다고 한탄한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인생이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다 가야 할 것이다.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외모를 말할 때, 퇴계(退溪)를 포함한 조선의 선비들이 ‘옥골선풍’(玉骨仙風)이라 하였으니 그는 도가풍의 미남자임이 분명하다.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하서의 일생을 다음의 몇 줄로 요약했다. “하서 김인후는 인품이 높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스스로 터득함이 있었음에도,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인묘(인종)는 동궁 시절에 그를 인재로 여겼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하서를 가장 먼저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아끼는 제자였던 인종이 곧 승하 하였다. 하서는 고향으로 되돌아갔고, 그 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다.” 


● 하서(河西)의 ‘자연가(自然歌)’, 소이연(所以然)의 진리에 순응하는 것.

 김인후(金麟厚)는 인종의 승하와 거듭되는 사화의 발발로 벼슬을 접었다. 불의한 시대에 벼슬하는 일을 욕되다고 여겨, 겨우 교리(敎理) 벼슬에서 은퇴해 버리고 시골에 묻혀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술과 시에 의지하며 후학들이나 양성하다 세상을 마쳤다. 그에게 있어 술은 괴로운 현실을 망각해버릴 만큼 흥취와 정한을 확충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그 취흥은 풍정(風情)과 정한을 순정한 시로 표출하고자하는 의지를 불러일으켰으며, 정치적 좌절에서 생긴 울분을 완화하고 ‘소이연(所以然)’의 진리에 순응하게 했다. 스스로 그렇게[自然] 될 수밖에 없는 까닭[所以然]에 순응하는 것. 다시 말해 ‘절로 절로’의 섭리는 선인들에게 있어서도 참된 인생살이의 정답으로 가는 길목쯤으로 여겼던 듯하다. 하서(河西)의 ‘자연가(自然歌)’만 해도 시대를 불문하고 꾸준히 회자되고 있고, 우암 송시열과 송강 정철 등 작가 논란이 많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 전반에 두루 통용되는 사상으로 공명을 일으켰다는 흔적일 것이다. 


6) 자연가(自然歌) ‘절로절로’ / 김인후(金麟厚) 

"청산(青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山木間)에 나도 절로, 

그 중(中)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다." 


○ 푸른 산 푸른 물 모두 순리에 따른 자연이다. 그 산수 속에 살고 있는 나도 자연이다. 이런 자연에서 순리에 따라 자라서 늙어가는 게 인간이다. 이에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노래이다. 대상에 무애(無碍)하고 유유자적한 정신적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절로(自然)’의 반복으로 자연스러운 율동감을 주는 가운데 자연과 인간의 일체된 모습을 그렸다.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己矣哉 自然生來人 將自然自然老]


● 경남 사천(泗川)의 성리학자 구암(龜巖) 이정(李楨), 조선 유학의 토대를 쌓다. 

 사천이씨 문중인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은 1512년 現 경남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龜巖’은 마을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 구암(龜巖)의 스승은 규암(圭巖) 송인수(宋麟壽) 선생이다. 그는 조정의 대간이었는데, 김안로의 폭정을 배척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어 왔다. 구암이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구암의 나이는 24세였다. 그 후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구암은 30세 때 영천군수를 비롯해 선산군수, 청주목사, 경주부윤,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구암은 70여 통 편지를 주고받았을 만큼 퇴계와 평생 교류했다. 구암은 도산서원을 찾았고, 퇴계는 사천을 찾았다. 구암(龜巖) 말년 57세 때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낙향해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571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버렸다. 


○ 구암(龜巖) 선생은 1546년 35세에 선산(善山)군수로 갔다가 일 년 만인 이듬해 9월 향리로 돌아왔다. 향리로 돌아온 후, 명산을 두루 찾아 즐기며 산수와 더불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1548년 37세 때 두류산에 올라 쌍계사에 머물렀다. 이때 두류산에서 읊은 시가 전하는데, 이 시 내용에는 두류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기르던 구암의 기개가 배여 있다. 


7) 두류산에서 노닐다 노래하다[遊頭流歌] / 이정(李楨 1512~1571)

山之高兮仁者靜 산의 우뚝함이여~ 인자(仁者)의 고요함 같아라

風之來兮聖之淸 바람 불어옴이여~ 성현의 깨끗함 같구나

白雲飛兮碧江深 흰 구름 비상함이여~ 푸른 강 흐르는 것 같아라

余懷之長兮誰與評 내 회포 많으니 누구와 더불어 평(評)할까나~


8) 깨어 있음[惺惺] / 이정(李楨 1512~1571)

須臾或放勢懷襄 잠시라도 혹 마음을 놓으면 어지러운 세상이 도래하니

一服淸心孰快嘗 오로지 선명한 마음이야말로 유쾌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欲掃胸中千萬病 마음속의 천만가지 병(病)을 쓸어버리려고 한다면

守惺惺法是眞方 항상 깨어 있게 유지하는 법, 이것이 참다운 방법이다. 

[주] 회양(懷襄) : ‘회산양릉(懷山襄陵)’의 준말로, 큰물이 넘쳐 산과 언덕을 포위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큰 재앙, 어지러운 세상.


○ 의식이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상태가 성성(惺惺)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과 적적성성(寂寂惺惺)이란 말이 불어(佛語)에 있다. 성성(惺惺)은 깨어 있음이요. 적적(寂寂)은 고요함이다. 깨어 있되 고요하라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은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론>에 나오는 단어로, 고요하면서도(寂) 의식이 맑게 깨어 있는 상태(惺)이며 이것은 모든 수행에서 근본으로 삼는 중요한 태도이다. “고요하고 고요한 본마음 바탕이 나의 고향이요, 성성이 깨어있는 삶이 나의 집이로다.(寂寂本故鄕 惺惺是我家)”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고 깨어 있는 가운데 고요해야 우리는 삶 속에서 밝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요함과 깨어 있음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 전개되는 것’을 성적등지(惺寂等持)라고 일컫는다. 깨어있음과 고요함을 함께 유지해야 된다는 뜻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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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휴재님의 댓글

휴휴재 작성일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주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