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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지공파
공은 11세조로 휘(諱)는 경(經)이요 호는 매강(梅岡)이다. 1506년에 등과하여 훈련원주부를 지냈으며 소임을 힘써 행하고 학문이 독실하여 문장이 뛰어났으니 이 사행(事行)으로 임금님에게 천문(薦聞)되어 병조참지로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곧 참지공파의 파조이시다. 만년(1558년)에는 구암과 남명 그리고 김 홍 등 여러 현유들과 어울려 도의교유(道義交遊)하였음이 여러 사록에 올라있다. 공의 후손은 세세마다 거듭 번창하여 진양의 송곡, 가정, 북창, 광석, 덕진, 용암과 함안의 용성, 합천의 봉산, 거창의 가조, 광성, 기리, 고성의 마암, 하일, 담양의 월산, 월계, 복정 등지에서 세거하고 근래에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마산, 진주 등 여러 지역에서 7대계 45소문중의 자손들이 각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2. 진사공파
공은 12세조로 휘(諱)는 을연(乙掾)으로 성균진사를 지냈으니 진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의 세후는 대대로 무과에 올랐으니 많은 훈공과 사적이 있을 것이나 가승(家乘)과 행장(行狀)을 세장(世藏)하지 못하였으므로 살필 길이 없고, 또한 세장지가 충남 공주인 것으로 보아 벼슬 따라 이거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나 후손들은 2대계 다섯 소문중이 논산과 대덕, 대전 등지에서 선향(先鄕)을 멀리 두고 족의(族誼)를 다지고 있다.
3. 참의공파
공은 11세조로 휘(諱)는 윤(綸:1502~未詳)이며 1526년(중종 2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니 참의공파(參議公派)의 파조이시다. 공은 여러 차례나 임금님의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더 나가지 아니하고 향리에 서당을 세우고 구암선생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여 문장이 높았다. 공의 후예(後裔)들은 훈련첨정, 부호군(副護軍), 보공장군, 절충장군 등 무관 벼슬로 대를 이었고, 특히 서벽재공(捿碧齋公: 휘 之漢, 1765~1834 綸의 9세손임)의 3대를 이은 효행은 신인(神人)이 감복한 이적(異蹟)으로 일어난 호감고사(虎感古事)와 효행시, 효자의 노래(孝子歌) 그리고 포현문(褒顯文)을 엮은 효감록(孝感錄)은 오늘날에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공의 세후 10대의 세장지(世葬地)를 여흘동(如屹洞)에 두고, 지금은 진양의 수곡(水谷)과 대평, 산청의 단성, 하동의 옥종, 북천, 양보, 그리고 곤양, 곤명, 진주 등지에 2대계 열두 소문중의 자손들이 세연(世緣)을 펴고 근실(勤實)하게 살고 있다.
4. 첨정공파
공은 12세조로 휘(諱)는 영(英:1624~未詳)으로 첨정공파(僉正公派)의 파조이시다. 공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으로 공훈이 있어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삼품 당상관)에 이르렀다. 공의 행장에 이어 세후의 행적을 소상하게 밝혀 적을 수 없음은 가승(家乘)을 세장(世藏)하지 못한 연유이거나 실전(失傳)하였음이니 상고할 수 있는 여러 흔적을 찾아 사실정립(史實整立)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공의 후손들은 3백년 동안을 세장지(世葬地)를 지켜 사천 축동 근린에서 세거하고 있으며 3대계 12소문중으로 지금은 사천 읍과 축동의 동치, 곤양과 영암 그리고 광양의 옥룡, 서울, 부산, 마산, 진주 등지에서 세장지를 인근하여 크게 덕목을 쌓아가고 있다.
5. 우소재공파
공은 13세조로 자는 자무(字武)이고 호는 우소재이며 휘(諱) 호변(1549~1596) 으로 우소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은 구암선생의 장손이니 조부로부터 학문을 사사 받았으며, 1570년에 동생 곤변과 나란히 문과에 급제함으로서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공은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군기시 주부를 지내고 학문이 뛰어나 문장으로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기질이 순미하고 천성이 효우하였으니 늦게는 벼슬을 버리고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공의 후손은 4대계 29소문중이 있고 주된 세거지는 사천의 정동, 대산, 가곡, 예수와 합천의 양지, 삼가, 거창의 남상, 남하, 신원, 하동의 금남, 광양의 봉강, 다압, 옥룡, 구례의 간전, 승주의 해룡과 전주 등지이나 지금은 서울, 부산, 대구, 마산, 진주 등 다수 지역에서 향골다운 자부와 명망이 있는 자손들이 많다.
6. 백인재공파
공은 13세조로 자는 자거(子擧)이며 호는 백인재라 하고 휘(諱) 곤변(1552~미 상)이니 백인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은 구암선생의 사려가 많았던 애중지손으로 열여덟에 진사시에 올라 삼천진(지금의 삼천포) 권관을 지냈으며 우소재공과 더불어 임란때 충무공(이순신 1554~1611)을 도와 무공을 세웠으니 실기(實記)에 공의 행적이 올라있다. 공은 학문과 문장이 대통하여 사리가 트인 걸출로 일찍이 오리(梧里) 이원익(1547~1634)은 남주의 인물됨을 공의 인품과 덕목을 칭찬하였으며 또한 많은 사서를 남겼으나 세전하는 것은 의와졸변(疑訛拙辯) 한권이 있을 뿐이다.
공의 후손은 4대계와 45소문중이 있으니 세거지는 사천일원과 하동의 화개, 청암, 금남, 악양, 진교, 거창의 가북, 고제, 가조, 방소, 마리, 용산, 용주, 위천, 남상, 합천의 양지, 함양의 안의, 남해의 삼동, 통영의 저구, 남원, 운봉, 광양, 진안, 부귀, 김천, 고령, 덕곡 등지인데 지금은 서울, 부산, 대구, 마산, 진주를 비롯 경향 각지에서 덕망있고 존경받는 후진들이 많이 있다.
7. 성균진사공파
공은 11세조로 자는 정원(貞元)이요 휘(諱)는 번(藩: 1520년대)이니 성균진사공 파의 파조이시다. 공은 보공장군을 지낸 휘 은(銀)과 선무원종공신에 오른 휘 연(椽)의 두 분 아드님 아래에 품계와 지체가 높고 많은 자손을 둠으로써 예후의 창성을 도모하였으며 현조(휘 이륜)이래 구암선생과 더불어 선향에서 반열을 지키고 선업을 이어 왔다. 공의 후손은 사천을 중심으로 화암, 구암, 대곡, 만마, 용두, 병둔, 신복과 진해, 창녕, 함양, 통영, 사량 등지에 세장지를 두고 근래에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김해, 진주, 삼천포에서 2대계 25문중의 자손들이 대망을 키우고 있다.
8. 선무랑공파
공은 11세조로 자는 자회(子晦)요 휘(諱)는 근(根, 1525년대)이니 선무랑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의 아드님인 군기시 주부를 지내신 휘 영(英)의 다음으로 3대를 이어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벼슬에 오르고 증손되는 사성(士成: 휘 義白 1639~미상)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종4품)이 되시었다. 첨정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무장다운 기백과 위엄이 있었으며 학문 또한 사군(師君)될 만 하였고 지극한 효성과 우애로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
공의 후손은 사천에서 곤명으로 곤명에서 하동 진교로 세장지를 옮겨 이곳을 인근하여 고룡, 양포, 금남, 횡천, 남해의 고현, 남원과 순천 그리고 하동읍에서 세거하고 있으나 근래에는 서울, 부산, 진주, 거제, 삼천포 등지에 2대계 다섯 소문 중의 자손들이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9. 상계1파 : 생원공파
공은 6세조이시며 휘(諱) 욱(稶: 1375년대)으로 생원공파의 파조이시다. 본파는 우리 종족이 분파한 최초의 상계1파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일한 계파이다. 공은 많은 문행으로 저명하였으며 성품은 청렴을 즐기시어 부귀와 영화에 기울지 아니하고 현효사친함을 본으로 삼았다.
공의 후손은 3대계 28소문중이고 세장지는 합천의 계산과 봉산의 고삼, 저포, 야로, 봉계, 대성, 용주와 거창의 가조, 가북, 신원에 두고 지금은 대구, 부산, 서울 등 여러 곳에서 대통을 이어 높은 기상과 선덕을 누리고 있다.
1. 참지공파
공은 11세조로 휘(諱)는 경(經)이요 호는 매강(梅岡)이다. 1506년에 등과하여 훈련원주부를 지냈으며 소임을 힘써 행하고 학문이 독실하여 문장이 뛰어났으니 이 사행(事行)으로 임금님에게 천문(薦聞)되어 병조참지로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곧 참지공파의 파조이시다. 만년(1558년)에는 구암과 남명 그리고 김 홍 등 여러 현유들과 어울려 도의교유(道義交遊)하였음이 여러 사록에 올라있다. 공의 후손은 세세마다 거듭 번창하여 진양의 송곡, 가정, 북창, 광석, 덕진, 용암과 함안의 용성, 합천의 봉산, 거창의 가조, 광성, 기리, 고성의 마암, 하일, 담양의 월산, 월계, 복정 등지에서 세거하고 근래에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마산, 진주 등 여러 지역에서 7대계 45소문중의 자손들이 각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다.
2. 진사공파
공은 12세조로 휘(諱)는 을연(乙掾)으로 성균진사를 지냈으니 진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의 세후는 대대로 무과에 올랐으니 많은 훈공과 사적이 있을 것이나 가승(家乘)과 행장(行狀)을 세장(世藏)하지 못하였으므로 살필 길이 없고, 또한 세장지가 충남 공주인 것으로 보아 벼슬 따라 이거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나 후손들은 2대계 다섯 소문중이 논산과 대덕, 대전 등지에서 선향(先鄕)을 멀리 두고 족의(族誼)를 다지고 있다.
3. 참의공파
공은 11세조로 휘(諱)는 윤(綸:1502~未詳)이며 1526년(중종 2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니 참의공파(參議公派)의 파조이시다. 공은 여러 차례나 임금님의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더 나가지 아니하고 향리에 서당을 세우고 구암선생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여 문장이 높았다. 공의 후예(後裔)들은 훈련첨정, 부호군(副護軍), 보공장군, 절충장군 등 무관 벼슬로 대를 이었고, 특히 서벽재공(捿碧齋公: 휘 之漢, 1765~1834 綸의 9세손임)의 3대를 이은 효행은 신인(神人)이 감복한 이적(異蹟)으로 일어난 호감고사(虎感古事)와 효행시, 효자의 노래(孝子歌) 그리고 포현문(褒顯文)을 엮은 효감록(孝感錄)은 오늘날에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공의 세후 10대의 세장지(世葬地)를 여흘동(如屹洞)에 두고, 지금은 진양의 수곡(水谷)과 대평, 산청의 단성, 하동의 옥종, 북천, 양보, 그리고 곤양, 곤명, 진주 등지에 2대계 열두 소문중의 자손들이 세연(世緣)을 펴고 근실(勤實)하게 살고 있다.
4. 첨정공파
공은 12세조로 휘(諱)는 영(英:1624~未詳)으로 첨정공파(僉正公派)의 파조이시다. 공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으로 공훈이 있어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삼품 당상관)에 이르렀다. 공의 행장에 이어 세후의 행적을 소상하게 밝혀 적을 수 없음은 가승(家乘)을 세장(世藏)하지 못한 연유이거나 실전(失傳)하였음이니 상고할 수 있는 여러 흔적을 찾아 사실정립(史實整立)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공의 후손들은 3백년 동안을 세장지(世葬地)를 지켜 사천 축동 근린에서 세거하고 있으며 3대계 12소문중으로 지금은 사천 읍과 축동의 동치, 곤양과 영암 그리고 광양의 옥룡, 서울, 부산, 마산, 진주 등지에서 세장지를 인근하여 크게 덕목을 쌓아가고 있다.
5. 우소재공파
공은 13세조로 자는 자무(字武)이고 호는 우소재이며 휘(諱) 호변(1549~1596) 으로 우소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은 구암선생의 장손이니 조부로부터 학문을 사사 받았으며, 1570년에 동생 곤변과 나란히 문과에 급제함으로서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공은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군기시 주부를 지내고 학문이 뛰어나 문장으로서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기질이 순미하고 천성이 효우하였으니 늦게는 벼슬을 버리고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공의 후손은 4대계 29소문중이 있고 주된 세거지는 사천의 정동, 대산, 가곡, 예수와 합천의 양지, 삼가, 거창의 남상, 남하, 신원, 하동의 금남, 광양의 봉강, 다압, 옥룡, 구례의 간전, 승주의 해룡과 전주 등지이나 지금은 서울, 부산, 대구, 마산, 진주 등 다수 지역에서 향골다운 자부와 명망이 있는 자손들이 많다.
6. 백인재공파
공은 13세조로 자는 자거(子擧)이며 호는 백인재라 하고 휘(諱) 곤변(1552~미 상)이니 백인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은 구암선생의 사려가 많았던 애중지손으로 열여덟에 진사시에 올라 삼천진(지금의 삼천포) 권관을 지냈으며 우소재공과 더불어 임란때 충무공(이순신 1554~1611)을 도와 무공을 세웠으니 실기(實記)에 공의 행적이 올라있다. 공은 학문과 문장이 대통하여 사리가 트인 걸출로 일찍이 오리(梧里) 이원익(1547~1634)은 남주의 인물됨을 공의 인품과 덕목을 칭찬하였으며 또한 많은 사서를 남겼으나 세전하는 것은 의와졸변(疑訛拙辯) 한권이 있을 뿐이다.
공의 후손은 4대계와 45소문중이 있으니 세거지는 사천일원과 하동의 화개, 청암, 금남, 악양, 진교, 거창의 가북, 고제, 가조, 방소, 마리, 용산, 용주, 위천, 남상, 합천의 양지, 함양의 안의, 남해의 삼동, 통영의 저구, 남원, 운봉, 광양, 진안, 부귀, 김천, 고령, 덕곡 등지인데 지금은 서울, 부산, 대구, 마산, 진주를 비롯 경향 각지에서 덕망있고 존경받는 후진들이 많이 있다.
7. 성균진사공파
공은 11세조로 자는 정원(貞元)이요 휘(諱)는 번(藩: 1520년대)이니 성균진사공 파의 파조이시다. 공은 보공장군을 지낸 휘 은(銀)과 선무원종공신에 오른 휘 연(椽)의 두 분 아드님 아래에 품계와 지체가 높고 많은 자손을 둠으로써 예후의 창성을 도모하였으며 현조(휘 이륜)이래 구암선생과 더불어 선향에서 반열을 지키고 선업을 이어 왔다. 공의 후손은 사천을 중심으로 화암, 구암, 대곡, 만마, 용두, 병둔, 신복과 진해, 창녕, 함양, 통영, 사량 등지에 세장지를 두고 근래에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김해, 진주, 삼천포에서 2대계 25문중의 자손들이 대망을 키우고 있다.
8. 선무랑공파
공은 11세조로 자는 자회(子晦)요 휘(諱)는 근(根, 1525년대)이니 선무랑공파의 파조이시다. 공의 아드님인 군기시 주부를 지내신 휘 영(英)의 다음으로 3대를 이어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벼슬에 오르고 증손되는 사성(士成: 휘 義白 1639~미상)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종4품)이 되시었다. 첨정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무장다운 기백과 위엄이 있었으며 학문 또한 사군(師君)될 만 하였고 지극한 효성과 우애로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
공의 후손은 사천에서 곤명으로 곤명에서 하동 진교로 세장지를 옮겨 이곳을 인근하여 고룡, 양포, 금남, 횡천, 남해의 고현, 남원과 순천 그리고 하동읍에서 세거하고 있으나 근래에는 서울, 부산, 진주, 거제, 삼천포 등지에 2대계 다섯 소문 중의 자손들이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9. 상계1파 : 생원공파
공은 6세조이시며 휘(諱) 욱(稶: 1375년대)으로 생원공파의 파조이시다. 본파는 우리 종족이 분파한 최초의 상계1파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일한 계파이다. 공은 많은 문행으로 저명하였으며 성품은 청렴을 즐기시어 부귀와 영화에 기울지 아니하고 현효사친함을 본으로 삼았다.
공의 후손은 3대계 28소문중이고 세장지는 합천의 계산과 봉산의 고삼, 저포, 야로, 봉계, 대성, 용주와 거창의 가조, 가북, 신원에 두고 지금은 대구, 부산, 서울 등 여러 곳에서 대통을 이어 높은 기상과 선덕을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