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별 문중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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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 1. 참지공파 문중

 

1) 파조

공의 휘는 경(經)이니 참봉공의 둘째아들 우윤공(右尹公) 휘 수화(秀華)의 아들이라 정덕 원년 병인에 과거하여 벼슬이 훈련원 주부였다. 늦게 서식할 곳을 감암산하에 정하고 호를 매강이라 하며 독실하게 배웠다. 문장이 높고 올바른 행동이 천문되어 중묘께서 병조 참지를 하명하신 비문이 있었으나 병난 중에 잃었으므로 직함이 구보(舊譜) 중에 누락되었다가 경술년 봄에 비로소 비명의 대자를 묘산 하촌에서 찾아 고쳐 세우고 등재하였다.

6세조인 교도공(敎導公)의 장자(長子) 휘(諱) 구주(九疇)공은 진주 서면에서 차이촌(車衣村, 현 진주시 집현면 신당리)으로 이주하고 그 후손은 감암촌(甘巖村, 현 대곡면 용암리 일대)의 용암, 월암, 설매에서 세거하였다. 참지공파(參知公派) 문중은 중종조(中宗朝)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내신 매강(梅岡) 휘(諱) 경(經)을 파조로 한다.

 

참지공은 중종 원년(1506년) 병인(丙寅)에 이행의(以行義)로 등천(登薦)하여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로서 소임을 힘써 행하고 학문이 독실(篤實)하며 문장이 뛰어났다. 만년(晩年: 1558년)에는 구암, 남명 그리고 김 홍 등 여러 현유(賢儒)들과 어울려 도의교유(道義交遊)하였음이 여러 사록(史錄)에 올라 있다. 대곡면 용암리 산68번지 종산에 정부인 진주 하씨와 합봉으로 묘와 비문이 남아 있다.

참지공의 손자 휘 인영(人英) 호 송강(松岡)은 벼슬이 통덕랑(通德郞)으로 평소 늠름(凜凜)하고 높은 풍채와 학문이 있었으며 서애(西崖) 유성룡과 시문을 교류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식견이 탁월하여 공경을 받았으며, 선조임금께서 왕세자 사부(師父)로 수차 명을 하였으나 사양하니 고을 사람들 사이에는 동성(사천)이씨는 높은 선비의 이름을 가진 자가 많다고 회자(膾炙)되었다. 묘는 미천면 어옥리(덕진동) 산210번지 종산에 부인 진주 강씨와 합봉(合封)으로 남아 있다.

 

2) 세거지(世居地)

참지공파 문중은 감암촌(대곡면 용암, 월암, 설매 일대)에 세거하다가 18세기 말 와룡리 송곡(松谷)으로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가정, 봉평, 북창 등에 살고 있는 후손은 대부분 송곡에 근거를 둔 참지공파이다.

공(公)의 후손은 세세(世歲)마다 거듭 번창하여 진양의 송곡·가정·북창·광석·덕진·용암, 함안의 용성, 합천의 봉산, 거창의 가조·광성·기리, 고성의 마암·하일, 담양의 월산·월계·복정 등지에서 세거(世居)하고, 근래에는 서울, 인천, 부산, 대전, 대구, 울산, 마산, 진주 등 여러 지역에서 7대계 45소문중의 자손들이 각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선산(先山)과 선조묘는 대부분 입향지 부근인 대곡면 용암리, 월암리, 설매리, 와룡리, 미천면 어옥리, 미곡리, 상미리, 의령군 화정면 가수리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지공파문중은 재실별로 진양군 대곡면 송곡문중(신재종중, 설송종중), 함안군 칠원문중, 거창군 가조문중으로 구분하고 있다. 송곡문중이 모성재(慕誠齋)에서 파조와 선조제사를 받들고 있고, 칠원문중은 숭모재(崇慕齋)에서, 가조문중은 모의당(慕義堂)에서 선조제사를 각각 받들고 있다.

 

3) 파조 및 선조 재실

(1) 모성재 현황

재실명칭

모성재(慕誠齋)

문 중 명

참지공파 송곡문중

소재지

진주시 대곡면 와룡리(송곡) 823-2번지

토지면적

476 ㎡

건물면적

32.73 ㎡

구조

목조 토기와

건축년도

1933

소유명의

봉의제(모성제)

대 표 자

25세 이준용

비고

2016년 11월 20일 중수, 건축물대장은 소재지가 823-1로 잘못 기재됨


모성재(慕誠齋)는 진주시 대곡면 와룡리(송곡) 823-2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1933년 창건 후 6세조 휘 자(稵) 교도공(敎導公)과 휘 욱(稶) 생원공(生員公) 두 분 조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향사(享祀)하는 재실(齋室)이었다. 기문(記文)을 이중담(李中聃)이 짓고, 운(韻)은 후손 완주(完柱), 경환(璟煥), 규생(圭生), 규홍(圭弘)이 썼으며, 상량문은 후손 천환(千煥)이 썼다. 교도공의 행장(行狀)을 적으면서 사천이씨의 선조는 대대(代代)로 효도하는 집안으로 조상을 공경(恭敬)하고 사모(思慕)함이 독실(篤實)하여 이를 가문(家門)의 계율(戒律)로 삼았다고 이르고 사천이씨의 부흥(復興)하는 기운(氣運)이 모성재(慕誠齋)로부터 나올 것이라 하였다.

 

1998년 사천시 정동면에 시조사우인 조원사가 봉건되면서 시조공 이하 6세조 7위의 신위를 이곳에서 향사(享祀)하고 있고, 모성재에서는 매년 양력 11월 셋째 일요일에 교도공 이하 참지공 파조와 선조제사를 모시고 있다. 모성재는 창건 후 한차례 보수가 있었으며, 2016년 11월 20일 진주 대곡면 송곡에서 출향(出鄕)한 참지공파 송곡문중(회장 24세 종수, 총무 25세 준용) 후손 58명이 3천 6백만원의 성금을 모아 중수(重修)했다.

 

(2) 숭모재(崇慕齋) 현황

재실명칭

숭모재(崇慕齋)

문 중 명

참지공파 함안칠원문중

소재지

경남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693번지(신기길 62-1)

토지면적

693㎡(210평)

건물면적

43.2㎡ 13평

구조

 

건축년도

 

소유명의

 

대 표 자

 

비고

 


14세조이신 별제공(別提公) 휘 행민(行敏: 1636~1693)과 公의 손자되는 16세조 초은공(樵隱公) 휘 세기(世杞: 1682~미상) 양위분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에 있다. 참지공(參知公)의 후손으로 이곳에 사는 자손들이 두 분 조의 업공(業功)을 추원보본(追遠報本)하기 위하여 정성을 모아 세웠다. 한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자손들이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항상 선조(先祖)를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는 마음 그것을 정성(精誠)이라 하였다. 기문(記文)은 안종희(安種禧)가 썼다.

 

(3) 모의당(慕義堂) 현황

재실명칭

모의당(慕義堂)

문 중 명

참지공파 거창(가조)문중

소재지

경남 거창군 가조면 기리 987번지

토지면적

146 ㎡

건물면적

35.99 ㎡

구조

목조 기와

건축년도

1946

소유명의

 

대 표 자

25세 이영열

비고

2004년(갑신년) 11월 3일 중수


17세조이신 의재공(義齋公) 휘 명순(命淳, 참지공의 後)의 제실(祭室)로, 입향조(入鄕祖)이신 公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46년(병술: 丙戌)에 모의당(慕義堂)을 세웠다. 김황(金榥)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그 후 60여년의 세월로 누추하여 2004년(갑신년) 11월 3일에 모의공 8대손 영철(永哲) 등 후손의 성금으로 중수했다. 경내에 「의재처사사천이공숭모비」(義齋處士泗川李公崇慕碑)도 함께 세웠다.

 

(4) 송호재(松湖齋)

18세조이신 죽파공(竹坡公) 휘 동복(東復, 참지공의 後) 조가 세워 인근(隣近)의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풍월(風月)을 즐기던 곳으로 지금은 없어졌다.

 

 

(각 종파별 문중 종친회는 다음의 해당 파를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1. 참지공파 문중

 

1) 파조

공의 휘는 경(經)이니 참봉공의 둘째아들 우윤공(右尹公) 휘 수화(秀華)의 아들이라 정덕 원년 병인에 과거하여 벼슬이 훈련원 주부였다. 늦게 서식할 곳을 감암산하에 정하고 호를 매강이라 하며 독실하게 배웠다. 문장이 높고 올바른 행동이 천문되어 중묘께서 병조 참지를 하명하신 비문이 있었으나 병난 중에 잃었으므로 직함이 구보(舊譜) 중에 누락되었다가 경술년 봄에 비로소 비명의 대자를 묘산 하촌에서 찾아 고쳐 세우고 등재하였다.

6세조인 교도공(敎導公)의 장자(長子) 휘(諱) 구주(九疇)공은 진주 서면에서 차이촌(車衣村, 현 진주시 집현면 신당리)으로 이주하고 그 후손은 감암촌(甘巖村, 현 대곡면 용암리 일대)의 용암, 월암, 설매에서 세거하였다. 참지공파(參知公派) 문중은 중종조(中宗朝)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내신 매강(梅岡) 휘(諱) 경(經)을 파조로 한다.

 

참지공은 중종 원년(1506년) 병인(丙寅)에 이행의(以行義)로 등천(登薦)하여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를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로서 소임을 힘써 행하고 학문이 독실(篤實)하며 문장이 뛰어났다. 만년(晩年: 1558년)에는 구암, 남명 그리고 김 홍 등 여러 현유(賢儒)들과 어울려 도의교유(道義交遊)하였음이 여러 사록(史錄)에 올라 있다. 대곡면 용암리 산68번지 종산에 정부인 진주 하씨와 합봉으로 묘와 비문이 남아 있다.

참지공의 손자 휘 인영(人英) 호 송강(松岡)은 벼슬이 통덕랑(通德郞)으로 평소 늠름(凜凜)하고 높은 풍채와 학문이 있었으며 서애(西崖) 유성룡과 시문을 교류하였다. 특히 성리학에 식견이 탁월하여 공경을 받았으며, 선조임금께서 왕세자 사부(師父)로 수차 명을 하였으나 사양하니 고을 사람들 사이에는 동성(사천)이씨는 높은 선비의 이름을 가진 자가 많다고 회자(膾炙)되었다. 묘는 미천면 어옥리(덕진동) 산210번지 종산에 부인 진주 강씨와 합봉(合封)으로 남아 있다.

 

2) 세거지(世居地)

참지공파 문중은 감암촌(대곡면 용암, 월암, 설매 일대)에 세거하다가 18세기 말 와룡리 송곡(松谷)으로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가정, 봉평, 북창 등에 살고 있는 후손은 대부분 송곡에 근거를 둔 참지공파이다.

공(公)의 후손은 세세(世歲)마다 거듭 번창하여 진양의 송곡·가정·북창·광석·덕진·용암, 함안의 용성, 합천의 봉산, 거창의 가조·광성·기리, 고성의 마암·하일, 담양의 월산·월계·복정 등지에서 세거(世居)하고, 근래에는 서울, 인천, 부산, 대전, 대구, 울산, 마산, 진주 등 여러 지역에서 7대계 45소문중의 자손들이 각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선산(先山)과 선조묘는 대부분 입향지 부근인 대곡면 용암리, 월암리, 설매리, 와룡리, 미천면 어옥리, 미곡리, 상미리, 의령군 화정면 가수리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지공파문중은 재실별로 진양군 대곡면 송곡문중(신재종중, 설송종중), 함안군 칠원문중, 거창군 가조문중으로 구분하고 있다. 송곡문중이 모성재(慕誠齋)에서 파조와 선조제사를 받들고 있고, 칠원문중은 숭모재(崇慕齋)에서, 가조문중은 모의당(慕義堂)에서 선조제사를 각각 받들고 있다.

 

3) 파조 및 선조 재실

(1) 모성재 현황

재실명칭

모성재(慕誠齋)

문중명

참지공파 송곡문중

소재지

진주시 대곡면 와룡리(송곡) 823-2번지

토지면적

476 ㎡

건물면적

32.73 ㎡

구조

목조 토기와

건축년도

1933

소유명의

봉의제(모성제)

대 표 자

25세 이준용

비고

2016년 11월 20일 중수, 건축물대장은 소재지가 823-1로 잘못 기재됨

모성재(慕誠齋)는 진주시 대곡면 와룡리(송곡) 823-2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1933년 창건 후 6세조 휘 자(稵) 교도공(敎導公)과 휘 욱(稶) 생원공(生員公) 두 분 조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향사(享祀)하는 재실(齋室)이었다. 기문(記文)을 이중담(李中聃)이 짓고, 운(韻)은 후손 완주(完柱), 경환(璟煥), 규생(圭生), 규홍(圭弘)이 썼으며, 상량문은 후손 천환(千煥)이 썼다. 교도공의 행장(行狀)을 적으면서 사천이씨의 선조는 대대(代代)로 효도하는 집안으로 조상을 공경(恭敬)하고 사모(思慕)함이 독실(篤實)하여 이를 가문(家門)의 계율(戒律)로 삼았다고 이르고 사천이씨의 부흥(復興)하는 기운(氣運)이 모성재(慕誠齋)로부터 나올 것이라 하였다.

 

1998년 사천시 정동면에 시조사우인 조원사가 봉건되면서 시조공 이하 6세조 7위의 신위를 이곳에서 향사(享祀)하고 있고, 모성재에서는 매년 양력 11월 셋째 일요일에 교도공 이하 참지공 파조와 선조제사를 모시고 있다. 모성재는 창건 후 한차례 보수가 있었으며, 2016년 11월 20일 진주 대곡면 송곡에서 출향(出鄕)한 참지공파 송곡문중(회장 24세 종수, 총무 25세 준용) 후손 58명이 3천 6백만원의 성금을 모아 중수(重修)했다.

 

(2) 숭모재(崇慕齋) 현황

재실명칭

숭모재(崇慕齋)

문 중 명

참지공파 함안칠원문중

소재지

경남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693번지(신기길 62-1)

토지면적

693㎡(210평)

건물면적

43.2㎡ 13평

구조

 

건축년도

 

소유명의

 

대 표 자

 

비고

 

14세조이신 별제공(別提公) 휘 행민(行敏: 1636~1693)과 公의 손자되는 16세조 초은공(樵隱公) 휘 세기(世杞: 1682~미상) 양위분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에 있다. 참지공(參知公)의 후손으로 이곳에 사는 자손들이 두 분 조의 업공(業功)을 추원보본(追遠報本)하기 위하여 정성을 모아 세웠다. 한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자손들이 어느 곳에 있더라도 항상 선조(先祖)를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는 마음 그것을 정성(精誠)이라 하였다. 기문(記文)은 안종희(安種禧)가 썼다.

 

(3) 모의당(慕義堂) 현황

재실명칭

모의당(慕義堂)

문 중 명

참지공파 거창(가조)문중

소재지

경남 거창군 가조면 기리 987번지

토지면적

146 ㎡

건물면적

35.99 ㎡

구조

목조 기와

건축년도

1946

소유명의

 

대 표 자

25세 이영열

비고

2004년(갑신년) 11월 3일 중수

17세조이신 의재공(義齋公) 휘 명순(命淳, 참지공의 後)의 제실(祭室)로, 입향조(入鄕祖)이신 公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46년(병술: 丙戌)에 모의당(慕義堂)을 세웠다. 김황(金榥)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그 후 60여년의 세월로 누추하여 2004년(갑신년) 11월 3일에 모의공 8대손 영철(永哲) 등 후손의 성금으로 중수했다. 경내에 「의재처사사천이공숭모비」(義齋處士泗川李公崇慕碑)도 함께 세웠다.

 

(4) 송호재(松湖齋)

18세조이신 죽파공(竹坡公) 휘 동복(東復, 참지공의 後) 조가 세워 인근(隣近)의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풍월(風月)을 즐기던 곳으로 지금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