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자료실

HOME > 다양한 자료실

미수 허목의 제수(휘 곤변(鯤變)의 손녀)의 묘명(墓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휴휴2
댓글 0건 조회 26회 작성일 26-01-10 00:04

본문

미수(허목)의 문집 기언 제42

 

허씨 선묘 비문(許氏先墓碑文) 자손의 비갈(碑碣)을 부기함.

 

의인(宜人) 이씨 묘명(墓銘)

 

제수 사천 이씨(泗川李氏)는 구암(龜巖) 부제학 이정(李楨)의 현손(玄孫)이다. 구암공은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대에 활동했던 군자로 중용되어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으니, 지금 만죽산(萬竹山) 아래에 이 선생의 사당이 있다. 할아버지 곤변(鯤變)과 아버지 대일(大一)은 모두 진사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영흥 도호부사(永興都護府使) 안세희(安世禧)의 딸이며, 동경 윤(東京尹) 안종도(安宗道)의 손녀이다.

 

제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안씨 집안(외가)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 선생의 가훈(家訓)이 자손들에게 남아 있어 마음과 눈에 익숙하였고, 또 외할머니 이 부인(李夫人)은 가르치고 기르기를 법도 있게 하여 전훈(典訓)을 어기지 않았으니, 자라서는 현숙한 행실이 있었다. 19세에 허씨 집안으로 시집왔다.

 

(허목)의 아우 의()는 자가 중휘(仲徽)이다. 젊어서는 기개가 있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경도시켰고 교제 맺는 것을 좋아하였다. 좋은 배필을 얻은 뒤로는 베풀기를 후하게 하여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였다.

 

인조(仁祖) 14(1636) 겨울에 병란이 일어나 사대부들이 산으로 바다로 달아나 숨었다. (허목)는 온 가족을 데리고 제수의 집에 가서 의지하였는데, 날마다 쓰는 의복과 음식 및 온갖 필수품을 모두 제수의 집에서 내왔으나 조금도 내 것, 네 것을 구분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며 해를 넘기도록 도로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가 하루아침에 따뜻하고 배부르게 먹어 스스로 만족하게 되니, 심지어 어린아이와 노복들까지도 기뻐하며 늦게 온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와서 10년을 살고 선비(先妣:어머니)가 운명하였는데, 봉양하는 도리와 장례 치르는 절차에 있어 제수는 제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슬프게 곡읍하여 고을 사람들이 크게 감격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수는 10년을 병을 앓았던 터라 선비를 반장(返葬)한 지 3년 만에 담제도 지내지 못하고 운명하니, 나이는 49세이다. 제수는 자식이 없어 나의 막내아우 서()의 아들 충()을 양자로 삼았다.

 

죽음에 임하여 결별하며 말하기를, “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습니다. 선친의 분묘가 진주(晉州)에 있는데, 자손이 이미 끊어졌습니다.”하고, 선친의 분묘 옆에 묻어주기를 청하며, 양자에게 선친의 제사를 부탁하였다. 그대로 장례를 치르고, 이윽고 제사를 부탁한 뜻을 미루어 혹시라도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차마 유명을 어길 수 없어서였다. 그 선친의 옆인 감곡(坎谷)에 장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다.

 

아 효성스럽고 또 자애로웠으나 / 嗚呼孝且慈

죽어서 천도의 보응이 없으니 / 歿而無天道之報

이 사람을 위해 슬퍼하노라 / 斯人之悼也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 | 2007

 

원문

嫂泗川李氏龜巖李副提學楨之玄孫也龜巖公當明宗宣祖世君子顯用爲弘文館副提學今萬竹山下有李先生祠大父鯤變父大一皆進士母順興安氏永興都護府使世禧之女東京尹宗道之孫也嫂早失父母育於安氏然李先生家訓在子孫習於心目又外祖母李夫人敎養有法能不違典訓長則有賢行十九歸許氏吾弟懿字仲徽少有氣槩立然諾傾人好結交旣得佳配厚奉給能致遠客仁祖十四年冬有兵亂士大夫奔竄嶺海吾擧族來依嫂家日用衣食百需皆出嫂家一毫無有彼此漂泊經年飢寒途路一朝溫飽自足至於童稚僕隷亦莫不忻然恨其來之遲也居十年先妣歿其奉養之道送終之節嫂無愛於髮膚而又其哭泣之哀鄕邑大感不幸嫂積疾十年旣返葬之三年不及禫嫂歿年四十九嫂無子取吾季弟舒之子翀爲後將死訣曰吾無子死先人墳墓在晉州子孫已絶乞葬於其側託所後兒因葬已而推其香火之寄或不卽絶不忍違也葬於坎谷其先人之次銘曰

嗚呼孝且慈歿而無天道之報斯人之悼也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