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 허목의 제수(휘 곤변(鯤變)의 손녀)의 묘명(墓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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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허목)의 문집 기언 제42권
허씨 선묘 비문(許氏先墓碑文) 자손의 비갈(碑碣)을 부기함.
의인(宜人) 이씨 묘명(墓銘)
제수 사천 이씨(泗川李氏)는 구암(龜巖) 부제학 이정(李楨)의 현손(玄孫)이다. 구암공은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대에 활동했던 군자로 중용되어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으니, 지금 만죽산(萬竹山) 아래에 이 선생의 사당이 있다. 할아버지 곤변(鯤變)과 아버지 대일(大一)은 모두 진사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영흥 도호부사(永興都護府使) 안세희(安世禧)의 딸이며, 동경 윤(東京尹) 안종도(安宗道)의 손녀이다.
제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안씨 집안(외가)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 선생의 가훈(家訓)이 자손들에게 남아 있어 마음과 눈에 익숙하였고, 또 외할머니 이 부인(李夫人)은 가르치고 기르기를 법도 있게 하여 전훈(典訓)을 어기지 않았으니, 자라서는 현숙한 행실이 있었다. 19세에 허씨 집안으로 시집왔다.
나(허목)의 아우 의(懿)는 자가 중휘(仲徽)이다. 젊어서는 기개가 있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경도시켰고 교제 맺는 것을 좋아하였다. 좋은 배필을 얻은 뒤로는 베풀기를 후하게 하여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였다.
인조(仁祖) 14년(1636) 겨울에 병란이 일어나 사대부들이 산으로 바다로 달아나 숨었다. 나(허목)는 온 가족을 데리고 제수의 집에 가서 의지하였는데, 날마다 쓰는 의복과 음식 및 온갖 필수품을 모두 제수의 집에서 내왔으나 조금도 내 것, 네 것을 구분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며 해를 넘기도록 도로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가 하루아침에 따뜻하고 배부르게 먹어 스스로 만족하게 되니, 심지어 어린아이와 노복들까지도 기뻐하며 늦게 온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와서 10년을 살고 선비(先妣:어머니)가 운명하였는데, 봉양하는 도리와 장례 치르는 절차에 있어 제수는 제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슬프게 곡읍하여 고을 사람들이 크게 감격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수는 10년을 병을 앓았던 터라 선비를 반장(返葬)한 지 3년 만에 담제도 지내지 못하고 운명하니, 나이는 49세이다. 제수는 자식이 없어 나의 막내아우 서(舒)의 아들 충(翀)을 양자로 삼았다.
죽음에 임하여 결별하며 말하기를, “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습니다. 선친의 분묘가 진주(晉州)에 있는데, 자손이 이미 끊어졌습니다.”하고, 선친의 분묘 옆에 묻어주기를 청하며, 양자에게 선친의 제사를 부탁하였다. 그대로 장례를 치르고, 이윽고 제사를 부탁한 뜻을 미루어 혹시라도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차마 유명을 어길 수 없어서였다. 그 선친의 옆인 감곡(坎谷)에 장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다.
아 효성스럽고 또 자애로웠으나 / 嗚呼孝且慈
죽어서 천도의 보응이 없으니 / 歿而無天道之報
이 사람을 위해 슬퍼하노라 / 斯人之悼也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7
원문
嫂泗川李氏。龜巖李副提學楨之玄孫也。龜巖公當明宗,宣祖世君子。顯用爲弘文館副提學。今萬竹山下。有李先生祠。大父鯤變。父大一。皆進士。母順興安氏。永興都護府使世禧之女。東京尹宗道之孫也。嫂早失父母。育於安氏。然李先生家訓在子孫。習於心目。又外祖母李夫人敎養有法。能不違典訓。長則有賢行。十九。歸許氏。吾弟懿。字仲徽。少有氣槩。立然諾傾人好結交。旣得佳配厚奉給。能致遠客。仁祖十四年冬。有兵亂。士大夫奔竄嶺海。吾擧族來依嫂家。日用衣食百需。皆出嫂家。一毫無有彼此。漂泊經年。飢寒途路。一朝溫飽自足。至於童稚僕隷。亦莫不忻然。恨其來之遲也。居十年。先妣歿。其奉養之道。送終之節。嫂無愛於髮膚。而又其哭泣之哀。鄕邑大感。不幸嫂積疾十年。旣返葬之三年。不及禫。嫂歿。年四十九。嫂無子。取吾季弟舒之子翀爲後。將死訣曰。吾無子死。先人墳墓在晉州。子孫已絶。乞葬於其側。託所後兒因葬。已而。推其香火之寄。或不卽絶。不忍違也。葬於坎谷其先人之次。銘曰。
嗚呼孝且慈。歿而無天道之報。斯人之悼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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