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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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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06.png 1) 건원록 개황

구계서원은 사천시 구암리 산43번지 만죽산(萬竹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1983년 7월 20일 지정번호 제40호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았다. 2018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고시 제2018-485호로 구계서원 명칭을 “사천구계서원”으로 변경하였다. 서원 부지는 3,967㎡이다.

구계서원은 명종 때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친 문신(文臣)이자 학자인 구암(龜巖) 이정(李楨)선생을 기리고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처음은 이정선생이 별세한지 40년 만인 광해군 3년(1611)에 유도(儒道)를 닦는 학자들과 고향의 마을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향리인 만죽산 아래에 구산사(龜山祠)란 사당을 지었다.

이후 인조(仁祖) 23년(1645) 4월에는 구산사 신도비가 건립되고 비명(碑銘)은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바 있는 양천(楊川)사람 미수 허목(許穆 : 1595~1682)이 지어 썼다. 숙종 원년(1675년) 유생 백이장 등 사천 사림(유학자)들의 소청(疏請)으로 1676년 4월 3일 나라에서 구계(龜溪)라는 액호가 내려 이때부터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액사제문(宣額賜祭文)은 예조정랑 유영립(柳英立)이 지었다.

그로부터 19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 대원군(大院君)이 섭정(攝政)하자 전국에서 사표가 되는 47개의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미흡한 사액서원은 모두 훼철 당했다. 그러다가 60여 년이 지난 1931년 봄에, 대관대유계(大觀臺儒契)의 힘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서원이 중건(重建)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3년 12월에 사단법인체로 등록되고 이어 1983년 7월 경남도 지정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원에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선생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 및 대사헌(大司憲)의 벼슬을 지낸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선생 세 분의 위패를 모셔 놓은 묘당(사당)과 뜰  아래에는 구산사비를 비롯하여 김덕함(金德諴), 최관(崔瓘) 두 선생의 기적비(紀績碑)가 나란이 서 있고, 또 내삼문(금기문) 밖 동쪽에는 거경재(居敬齋)와 명의재(明義齋), 서쪽에는 구계서원, 남쪽에는 풍영루 등의 건물이 있다. 미수 허목이 구산사비에 새겨 놓은 비명(碑銘)은 가로되 ‘명(冥)은 물에 근심하였기에 제사하며, 용(龍)은 땅에 근실하였기에 제사하노라’하였다.

 

iq06.png 2) 구계서원 연혁

1611년(辛亥) 광해(光海) 3년에 문하 유생들이 선생의 영위(靈位)를 모실 구산사(龜山祠)와 구계서원을 세우고 봉안향례(奉安享禮)를 받들었는데 상량문(上樑文)은 향당의 유생 김윤안(金允安)이, 봉안문(奉安文)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우의정을 지냈음)가, 춘추향고문(春秋享告文)은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 1541-1615 형조판서를 지냈음)이 지었다. 지방유림의 공의로 퇴계 이황(李滉)의 위패를 모시다..

1641년(辛巳) 인조(仁祖) 19년 선생의 유문(遺文)들을 모아 구암문집 원집 상ㆍ하권을 발간했는데 서문(序文)은 용주(龍州) 조경(趙絅, 1586-1669 대재학을 지냈음)이, 발문(跋文)은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6-1682 우의정을 지냈음)이 지었다.

 

1645년(乙酉) 인조(仁祖) 23년 구산사원정(龜山祠院庭)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미수선생(眉叟先生)이 지어서 친필로 새겼다..

1656년(丙申) 효정(孝宗)7년 이가순(李家淳) 등 많은 후학들이 구암선생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시장(諡狀)을 예조에 품진하였다.

1675년(乙卯) 숙종(肅宗) 원년 대관재(大觀齋)의 유림대표(儒林代表)인 백이장(白而章)등이 구산사(龜山祠)에 사액(賜額)을 청(請)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이듬해인 1676년에 구계서원(龜溪書院)으로 액호(額號)가 내림과 동시에 숙종(肅宗) 임금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예조좌랑(禮曺佐郞) 유영립(柳英立)이 와서 제향을 받들었으며, 이때 사원(祠院)을 중건하고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김윤안(金允安)이,중건봉안문(重建奉安文)은 장응일(張應一)이 지었으며 선생이 기세(棄世)했을 때 선조임금이 내린 제문(祭文)에 이어 이때가 두 번째 내린 사제문(賜祭文)이다.

 

1728년(戊申) 영조(英祖) 4년 인조(仁祖) 때 문신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 1562~1630 대사간을 지냈음)을 대관재유림(大觀齋儒林)의 총의로 구산사(龜山祠)에 배향했으며, 성옹(醒翁)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사천(泗川)에서 6년을 귀양 살았는데 이때에 사천의 후학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1748년(戊辰) 영조(英祖) 24년 구암문집 속집상․하권을 발간했으며 이때의 발문(跋文)은 어윤성(魚允成)이 썼다.

1871년(辛未) 고종(高宗) 8년 대원군(大院君)의 령(令)으로 전국에서 600여 개소의 사원(祠院)이 훼철(毁撤)될 때 구계서원도 철폐되었으니 구산사(龜山祠)가 창건된지 260여년 만에 유향(遺香)을 잃었다. 이때에 서원(書院)이 소장하고 있던 서원관련문서와 서책(書冊), 유림관련기록과 현판(懸板), 제기(祭器) 등을 모두 대관재(大觀齋)로 옮겨와서 이때부터 대관재에서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석다례(釋茶禮)를 받들었다.

1898년(戊戌) 11월경 대원군의 세력이 약해지자 사천 지역 각 문중과 향교 유림,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훼철 당시 몰수 안 된 재산 등을 복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훼철된 후 30여년이 지난 1900년 조선 말기에 유림에서 뜻을 모아 대관대와 대관대서재를 증수(增修)하여 제향을 받들었다.

1931년(辛未) 서원이 훼철된 후 60년 만에 유림회원의 서원 복원을 위한 노력으로 현존 서원과 2개의 부대시설이 준공되었다. 이때는 일제강점기 이었으며, 삭녕최씨 최관 선생의 위패봉안 문제로 제향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67년간 정상적인 제향을 받들지 못하다가 다행히 1998년 3월 양 문중과 대관대유계의 분쟁이 종결되고 첫 제향을 올림으로써 정상화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한다.

 

iq06.png 3) 구계서원 상량문(上樑文)

올바른 학문은 표준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근원에 대한 소문은 오래되었다. 유학에 있어서는 남쪽의 참다운 유학자를 큰 스승으로 삼을만하다. 처음으로 새로 지어진 묘당의 청정함을 보니, 큰 대들보 빼어나게 드리움에, 낙성식에 대한 축하의 말(燕賀)을 드리고자 한다.

… (중략) … 현(縣)은 사수(泗水)에 있으니, 진실로 공자(孔子)가 강론했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이름에 부합하고, 마을 이름은 구암(龜巖)이니, 역시 영험한 풀 시초(蓍草)와 신비한 거북등 귀갑(龜甲)의 지혜에 들어맞습니다. 충성과 신의가 집집마다 있게 될 것이며, 덕업은 감연히 천년세월에 스며들 것입니다. 이에 옛 집의 곁에서 나아가 비로소 높은 산 우러러 볼 수 있도록 지었습니다. 때로는 돈이 부족하여 곳간을 덜기도 하고, 목재를 모으고 장인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이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감히 축하의 말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영차! 대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정원 앞 풀 변함없이 짙게 푸르다. 당일 무성한 꽃 류지(柳地) 따르니, 해마다 한번 씩 봄바람 맞으리라.

어영차! 대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광대무변한 두류산 첩첩히 줄지어 있다. 위로는 푸른 하늘, 아래로는 넓은 바다, 높은 봉우리 천고의 세월에도 응당 고개 숙이지 않는다.

어영차! 대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음양의 조화 고요함 속에 탐색한다. 심원한 집안에는 하루 종일 찾아오는 손님 없고, 처마 밑 한 쌍의 제비만 지저귀고 있다.

어영차! 대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어젯밤 매화가지에 꽃 새로 피었다. 거센 바람 눈보라에 암향 떠도는데, 말없이 맑은 가지 대하니 빈방 환히 밝아진다.

어영차! 대들보 위로 던지니, 맹렬한 솔개의 기세 하늘 가운데 그 모습 빛난다. 하늘 조화 저절로 움직이니 사람은 알 수 없어, 부분적인 중용(中庸)은 손바닥 가리키는 것과 같다. 어영차! 대들보 낮추어 던지니, 자욱한 대숲 속에 샘물 쏟아져 내린다. 옷깃 여며 꿇어 앉아 그 모습 드러내면, 좋은 기운 틀림없이 이 밝은 밤에 헤아릴 수 있으리.

원컨대, 상량 후에는 모든 사람 수양하고, 선비는 갈고 닦으며, 굽어서는 글 읽고 우러러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어버이 말씀 이어받아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웃어른 공경하여, 응당 두터운 윤리의 모범을 펼칠 수 있기를.

 

iq06.png 4) 구계서원 경내시설현황

 

(1) 구산사

구산사(龜山祠)는 구암선생의 영위(靈位)를 봉안(奉安)한 사우(祠宇)이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40여년이 되던 1611년(광해 3년 신해)에 향당(享堂)의 유생들이 구암(龜巖)땅 국사당(國祠堂) 자리에 사우를 세우고 선생의 유영(遺靈)을 모시었으니 매년 춘추로 경건하게 향사(享祀)를 받들었다.

구산사 봉안문(舊山祠 奉安文)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인조 때의 상신) 선생이 짓고, 춘추향고문(春秋享告文)은 만전(晩全) 홍가신(1541~ 1615. 선조때의 공신) 선생이 지었다.

 

(2) 구산사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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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사비

구산사 신도비(龜山祠 神道碑)는 1645년에 사원(祠院 : 구산사와 서원)의 뜰에 비를 세워 선생의 유향(遺鄕)을 기리고 행장(行狀)과 사적(事績)을 새겨 천세만세(千歲萬歲)에 받들게 하였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미수(眉叟) 허목(許穆 : 1595~ 1682, 대사헌과 우의정을 지냈음) 선생이 지어 썼다. 이 신도비는 구계서원(원장 이은식 박사)에서 신청하여 2018년 8월 9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35호로 지정되었다. 명칭은 “사천 구산사비”이고 수량은 1기(1.5㎡)이다.

 

<구산사비>는 비문의 글씨가 새겨진 비신(碑身)의 크기가 가로 80cm, 세로 170cm, 두께 19cm이다. 비의 받침에 해당하는 귀부(龜趺)와 머릿돌에 해당하는 이수(螭首)를 포함하면 전체 높이는 285cm에 달한다. 비신의 재질은 석각(石刻)에 용이한 사암(砂岩)으로, 경남 일원의 비석에서 자주 보이는 석질이다. 귀부와 이수의 재질은 일반적인 화강암으로 사료된다. 비가 세워진지 373년이 되었는데 현재까지 위치변동이 없었다면, 귀부를 받치는 지대석(地臺石)은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른 유적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유형이다. <구산사비>는 미수(眉叟)의 중년기 서예 정수를 만끽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비석으로, 조선의 금석문 중에서도 역사·예술적 희소가치가 높다.

 

(3) 거경재(居敬齋)

동재(東齋)인 거경재(居敬齋)는 본래 과거(科擧)를 앞두고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처음에 퇴계(退溪)선생이 이곳에 들러 이름(題)하여 거경(居敬)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경(敬)은 경이직내(敬以直內)이니 공경함으로서 마음을 안으로부터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리어(理語)로서 경(敬)에 이르자면 삼가(謹愼)함이 있어야 하고, 엄숙(嚴肅)함이 있어야 하고, 공겸(恭謙)함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를 모두 마음속 깊이 갖추고 이곳에서 묵으면서 학업(學業)을 닦는 거재(居齋)이다.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재명(齋名)으로 지은 다음과 같은 시(詩)가 있다.

 

一寸膠無千丈渾 玉淵秋月湛寒泉  일촌교무천장혼 옥연추월담한천

端居日日如臨履 箇是存存道義門  단거일일여임이 개시존존도의문

조그마한 아교는 천질의 혼동 중에도 섞일 리 없고

옥같이 맑은 못 가을 달에 찬 샘물은 맑데

아침저녁 단정이 앉아있기를 마치 엷은 살얼음 밟 듯하여   

이것을 헤아려 살피면 바로 있네 도의의 문이.

 

(4) 명의재(明義齋)

서재(西齋)인 명의재(明義齋)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명의(明義)는 의(義)를 밝힌다(明)는 뜻인데 의이외방(義以外方)이라 하여 의(義)로서 바깥을 바르게 지니고 경(敬)으로서 내심(內心)을 바르게 지킴으로서 경과 의가 함께 있게(경의협지; 敬議夾持)하여 고루 닦음으로서 비로소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니 그 마음은 반드시 경(敬)으로 하여금 주재되게 하여야 하고 그 마음과 몸을 정밀하게 다듬기를(정연; 精硏) 오랫동안 계속하여 쌓임이 있어야만 의(義)를 밝히는(明) 공(功)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재명시(齋名詩)를 소개하면

 

義路如砥坦且明 一昏心燭故難行 의로여지탄차명 일혼심촉고난행

欲知大寐如醒擧 唯任精硏精久生 욕지대매여성거 유임정연정구생

옳은 길은 숫돌과 같이 단단하고도 밝으나

마음의 촛불 만약 한번 어두워지면 행하기가 어렵나니

크게 잠들어도 깨어있는 것 같음을 알려고 한다면

오직 정밀하게 다듬는 오랜 생활을 쌓아야 하네.

 

(5) 불기당(不欺堂)

불기(不欺)는 스스로를 마음으로 부터 속임이 없어야 한다는 수심(修心)하는 법인데 먼저 마음을 갖임에는(지심; 持心) 그 마음을 귀한테 두고(실재; 實在) 속임이 없어야(不欺) 본심(本心)과 성품(性品)을 착하게 기를 수 있다(존양; 存養)고 하여 이 당(堂)은 옛 선비들이 글방에 들기 전에 마음을 닦는 곳이다. 퇴계(退溪)는 말하기를 마음을 닦자며는 낮이나 밤이나 목숨을 걸고 저승(황천; 黃泉)으로 드는 문을 다시 여는 듯 하여야하고 사물(事物)을 분별(分別)하는 데에도 칼로 자르 듯 절연(截硏)해야지 감히 거만(倨慢)하다면 하늘이 도웁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퇴계(退溪)의 불기당시(不期堂詩) 외 여러 편(篇)이 있다.

 

(6) 홍살문

서원입구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우뚝 서 있다. 홍살문은 주로 서원이나 향교에 설치하였으며, 집안 재실에도 설치하였다. 또한 능과 묘에도 설치했으며 충신, 열녀, 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에도 홍살문을 설치하도록 했으며,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홍전문(紅箭門)·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은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고 삿된(보기에 하는 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나쁜) 것을 막아 경역(境域)을 청정하게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뜻이 담긴 상징적인 건조물이다. 홍살문은 구계서원 분쟁이 종결된 후 2017년 새로설치되었다.

 

(7) 송병선 열사 대관대 중수기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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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대 중수기 비

(사)구계서원대관대유계회(이사장 최상화, 서원장 이은식)는 2019년 12월 21일 10:30 송도근 사천시장, 박정열 경남도의원, 정우락 경북대 교수, 이선영 대종회 회장, 사천향교, 대관대유계회, 사천이씨 문중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구계서원 입구에서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열사 대관대 중수기 비 제막식을 가졌다.

 

공은 은진 송씨로서 구암선생의 스승인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 선생의 후손이며, 1901년 12월 대관대 중수(重修) 기문(記文)을 썼다. 기문 중에는 …중략… “바다를 본 자에게는 큰물이 되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 공부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말이 되기 어렵다. 하물며 이곳은 니산(尼山)이 우뚝 높고 사수(泗水)가 길게 흘러 그 마을과 유사함이 있으니, 공자(孔子)의 학문을 공부하여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던 것을 나도 또한 해 낼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한계를 그어 놓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당시 구암공(龜巖公)께서는 이 시의 뜻에 깊이 터득함이 있어서 작게 보는데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공부 한 바가 풍부하였다. 그래서 집에 있으면 집을 반듯이 하고, 정치를 하면 잘 다스렸으며, 후진을 교육함에 게으르지 않고, 도(道)를 더욱 독실하게 믿으며 학문을 일으키고 숭상하였던 것이니, 사람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를 칭송하고 또 제사를 받든다.…중략….”라 적고 있다.

 

일제가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연재 공은 이에 통분하며, 선비가 나라에 충성하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여 1906년 1월 25일 (음)12월 30일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에 구계서원대관대유계회에서는 1919년 기미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공의 유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천시의 지원을 받아 대관대 중수기 비 제막식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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