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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절경 내영산(內迎山) 유산기

 

경북 포항 보경사를 품고 있는 내영산(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문학의 소재로 삼은 사람은 청하현감으로 왔던 당대의 문장가 백운거사(白雲居士) 옹몽진(邕夢辰)이라 알려지고 있다. 옹몽진은 전원(田園) 생활의 담담함을 문학으로 표현하였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자처하며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찾아왔다가 동해 바닷가의 내연산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옹몽진이 귀향하면서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였던 경주부윤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사대부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정(李楨)은 중국문학사에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본격적으로 문학의 제재로 삼았던 사령운(謝靈運, 385~433, 중국 송나라 산수시인)의 산수 탐방과 주자의 형산 축융봉 산놀이를 재현하였다. 그가 1562년에 내연산을 찾은 뒤부터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서 내연산은 유산(遊山)으로 명산이 되고, 많은 시문의 창작 공간이 되었다. 황여일의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에는 이정(李楨)이 내연산을 찾아와서 지은 시(詩)는 응봉에서 발원하는 내연계곡을 보며 인생과 학문의 연원을 생각하는 주제를 표현하였다고 전한다.

 

내영산에 노닐며 遊內迎山(유내영산)

今朝雲翳豁然開(금조운예활연개) 오늘 아침 구름 안개 활짝 개어

,盡日窮源踏翠苔(진일궁원답취태) 종일토록 냇물의 근원을 찾아 푸른 이끼를 밟았네.

花柳滿山誰會意(화류만산수회의) 꽃과 버들 산에 가득한데 누가 있어 그 뜻을 헤아릴까?

一川風月獨徘徊(일천풍월독배회) 한 줄기 계곡물, 바람과 달만이 홀로 서성이는 것을.

 

내영산에 노닐며 遊內迎山(유내영산)

川回谷轉路層層(천회곡전로층층) 냇물이 돌고 골이 굽으며 길이 층층이라,

盡力躋扳次第登(진력제반차제등) 힘을 다해 걷고 끌며 차례로 오르네.

十二瀑流流不息(십이폭류류불식) 열두 폭포 흘러흘러 쉼이 없어도,

源泉一脈本淸澄(원천일맥본청징) 근원의 샘물 한 줄기는 본래 맑다.

 

청하 내영산에 와서 遊內迎山在淸河(유내영산재청하)

洞門積氷雪(동문적빙설) 골짜기 입구에 눈과 얼음 쌓여 있어서,

病客難重尋(병객난중심) 병든 나그네 다시 찾기 어렵구나.

他日如容我(타일여용아) 다른 날 나를 받아준다면,

窮源不厭深(궁원불염심) 근원을 찾아 산 속 깊이 가길 마다않으리.

 

1562년 구암의 내연산(내영산) 유산(遊山)이 있은 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앞 다투어 내연산의 진달래꽃과 단풍을 찾아왔다. 그들은 경관에 이름을 부여하며 명소(名所)들이 주는 의미와 감흥을 문학으로 표현하며 몸을 닦았다. 1688년 내연산의 암자들을 찾아왔던 원주의 대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삼용추에 산의 기운이 모두 모여 있어서 금강산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곳이 사랑스러워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삼용추에 산놀이 왔던 시인 묵객들은 붓으로 바위에 이름과 시를 적었고, 벼슬아치들은 정으로 이름을 파고 붉은 칠을 하였다. 바위벽에 새겨진 이름들은 360여 개가 된다.

 

내연산도 신라, 고려시대 이래로 불교와 도교의 산으로서 조선시대의 사대부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산이었다. 봉화의 청량산이 퇴계가 아끼며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의미 있는 명산이 된 것처럼 내연산(내영산)이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해월 황여일의 <유내영산록(遊內迎山錄)>에는 보경사 학연(學衍) 스님의 대답을 전하고 있다.

 

1587년 8월 7일, 황여일과 그 숙부 황응청은 이날 내연산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경사(寶鏡寺)에서 잤다. 조매당[趙梅堂, 조정간(趙廷幹)]은 대두(大豆)를 보내어 연포탕(軟泡湯)을 끓이게 하니 이는 우리들과 배부르게 먹고자 함이고, 김명숙(金明叔)이 소설책과 오래된 술을 남겨두었으니 이는 우리들과 취하고자 함이다. 배부르게 먹고 또 취하면서 승려들과도 더불어 우도(友道)를 함께 하였다.

8월 8일 을축, 맑음. 학연(學衍)이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 말하기를, “이 산은 예전에 세상에 이름이 없었습니다. 오직 선동(仙童-도교 신선술 수련자)과 석자(釋子-불교 수행승)의 굴과 집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몇 년 사이에 옹(邕)씨 성을 가진 태수가 있어서 은자(隱者)를 흉내 내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내영산을 동경(東京-慶州) 부윤(府尹) 이(李) 구암(龜巖-李楨: 1512~1571) 선생에게 알렸습니다. 구암은 곧 사령운(謝靈運)이 한 대로 나막신을 밀랍칠하여[납극(蠟屐)] 이곳을 여행하였고, 여름에 재차 유람하여 축융봉(祝融峰) 유산(遊山)을 재현하였습니다. 구암은 선비들이 우러러 보는 분위기에, 여행하는 자들은 구암이 다닌 곳과 그 자취를 따라 다녔습니다. 선비들이 구암(龜巖)이 돌아간 대로 돌아가고, 구암이 발자취를 남긴 대로 발자취를 남긴 까닭에 구암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고 산이 그와 더불어 같이 유명해졌습니다. 이 후로 영남에서 유람하는 선비로 산을 말하는 자는 봄에 진달래를 찾고, 가을에 단풍 숲을 아끼며, 내영산을 다투어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공무를 띠고 지나가던 지방 관리(棠使)나 중앙관료(星臣)에 이르기까지 또한 계절마다 묵어갔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산의 이름을 구암(龜巖)으로 얻음이 성대하도다. 산의 이해득실은 떨치는 이름으로 생기는 것인데 어찌 떨치는 이름을 낮추려고 생각했겠는가? 사물도 또한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산이 어찌 그렇게 이름 지어지기를 요구했겠는가? 돌아보건대 이름을 지은 자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싱싱하게 푸르면서 만년토록 연마하기 어려웠음이라. 이름이 있고 이름이 없는 것은 다만 산의 나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니 이 때문에 호계일소(虎溪一笑)라는 말이 있다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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