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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송제공(松齊公) 화주대적기념비(華株臺跡記念碑)

 

송제공은 휘(諱)가 규진(奎鎭)이며 호(號)는 송제(松齊)로서 1859년(己未, 咸豊 9년) 3월 초 증광생원시(增廣生員試)에 급제하고, 진주 도산서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유위(有爲)한 인재양성과 행의현효(行誼賢孝)하심이 상문(上聞)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당상관)에 서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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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송곡에 세워진 화주(華株)는 훼철(毁撤)되고, 2001년(辛巳) 중구절(重九節)에 대곡면 와룡리(송곡) 806번지 고지(古址)에 공의 화주대적기념비(華株臺跡記念碑)와 사적비를 새로 세웠다. 기미증광사마방목(己未增廣司馬榜目)과 교지(敎旨)는 후손(24세 在乙)이 보존해 왔다.

현손(玄孫)인 취암(翠巖:재을)은 송제공 유품영인본 발간사 중에서 “조상의 위적(偉跡)의 실증은 주손(冑孫: 맏손자)인 내가 보장하고 있으며, 세세손손 주손이 영세보장할 것이다.

연(然)이나 같은 혈손인 지손(支孫)도 같은 자손임에 가보(家寶)의 봉심(奉審)은 당연지사이겠으나 관수상(管守上)의 사정 등으로 봉심(奉審)이 쉽지 않기에 이 난정(難情)을 이해하고 보장 중인 가보를 영인 제공하니 영인본(影印本: 복사본)을 접하는 제손(諸孫)들은 원보(原寶)처럼 관수할 것이며 우리 모두는 조상의 위적(偉跡)과 유지(遺志)를 봉승(奉承)하여 숭조애손(崇祖愛孫)의 뜻을 이어 받아 숭조상문의 정신고양에 전심정진(專心精進)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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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제공 사적비와 화주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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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제공 증광생원시 급제 교지(敎旨)

 

송재선생 동성이공 사적비문 병서

행실과 문덕(文德)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이가 있으면 그 훌륭함을 후세에 전하고자 어떤 사람은 사모하여 칭송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쇠나 돌에 새겨 남의 귀와 눈에 널리 알려 전파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기리게 하니, 이러한 일은 덕을 좋아하는 것에서 유래된다.

옛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현인이 지나가는 곳의 산천초목은 모두 정채(精彩)로 움을 띤다고 하였다. 더구나 높은 관직을 지낸 분이 안식하셨던 곳이야 어떠하겠는가?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이 무성한 풀숲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은 옛적 철종 년간에 송재선생의 화주(華柱)가 세워진 유적지다’라고 하였다.

후손된 자 이곳에 표시를 해두고자 한 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던가, 더구나 공은 처음 송곡에서 장사지냈으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었다. 후손들이 더욱 번성하여도 세태는 옛날 같지 않아서 경향 각지로 흩어져 사니 장래에 누가 공의 자취를 알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규진(奎鎭)이시고, 자는 원경(元卿)이시며, 호는 송재(松齋)이시다. 시조는 고려 때 진사를 지낸 송악군수 휘 식(軾)이시며, 이후 대대로 과거와 높은 관직, 학문과 덕행이 두터운 사족이다. 조선조에 들어 휘 언(彦)은 진사로 보승낭장(保勝郎將)이시고, 아들 휘 자(稵)는 성균진사 담양교도(潭陽敎導)인데 충효로써 덕망이 있었다. 장수하여 『수서시첩(壽瑞詩帖)』이 있으니 진산부원군 강맹경, 농암 이원보, 퇴계 이황, 신재 주세붕 등 여러 선비가 서문과 발문을 지으셔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휘 경(經)은 병조참지(兵曹參知)시고, 증조 휘 인재(仁梓)는 호가 매와(梅窩)인데 학문과 덕행이 두터워 가선대부판중추부사(嘉善大夫判中樞府事)에 오르셨고, 조 휘 동림(東林)의 호는 소헌(素軒)이시며, 고 휘 영찬(英燦)은 숨은 덕이 있었다. 비(妣)는 남평문씨 사민(師敏)의 딸로, 정조 임인년(壬寅, 1782) 설매리(雪梅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타고난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시고 재주와 덕망을 고루 갖추었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 글방에 나아가서는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부지런히 공부하시니 문리(文理)가 스스로 통하였다. 경전 외에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서를 두루 읽고 오묘한 뜻을 깊이 연구하셨으며, 일상생활에서도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면 가까이 하지 않았다. 부모를 모심에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봉양하셨으며, 정성과 공경함을 다하셨고, 조상을 받듦에 있어서도 정성을 다하였다. 일상에 예를 행함에 있어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조선시대 선현들의 저술을 사용하였으며, 세 형제와 더불어 우애가 돈독하였다.

 

가족과 거처함에 있어서는 당나라 장공예(張公藝)의 참는 법을 사용하였고, 고을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조목을 실천하니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일찍이 학문과 교양에서 오는 덕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 원장에 추천되시니 원근에서 따라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다. 제자들에게 예법뿐만 아니라 그 그릇에 따라 가르치니 성취한 자가 적지 않았다. 세시에 시(詩)와 예(禮)를 가르치고, 때때로 학문을 함에 여가가 있으면 남과 같이 과거공부를 하셨다.

 

족대부(族大父) 정복(挺復) 죽헌공(竹軒公)이 만년에 송곡(松谷)에 살았는데, 정사(精舍)를 지으시고 성윤(成潤), 이대연(李大演) 등 여러 생도와 더불어 부지런히 강론하였다. 죽헌공과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공과는 나이차이가 있었음에도 서로 도의로서 사귀었다.고금의 성현이 지으신 글을 찾아 그 뜻을 깊이 탐구함에 있어서는 긴긴밤을 지세였으며, 주역을 낭송함에 있어서는 도포와 같은 허름한 옷을 입어도 패옥(佩玉)보다 화려하게 생각하였고, 맹물을 마셔도 진수성찬 보다 달게 여기는 것을 자신의 심성으로 삼았다. 죽성(竹醒) 정은교(鄭誾敎) 공은 선생의 전(傳)에 ‘부귀로서 사람의 마음을 음탕하게 할 수 없고, 가난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옮기게 할 수 없다’는 맹자에 나오는 어순을 들어 고금에 공과 같은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하였다.

 

철종 무오년(1858)에 함안 향시에서 장원하시고, 다음해 기미년(1859)에는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였다. 효행으로 절충장군용기위부호군에 천거 임용되시니, 단계공을 비롯한 많은 선비가 축하시를 지었다. 몇 달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 20일에 송곡서당에서 별세하니, 만사(輓詞)와 뇌사(誄辭)를 지어 와 곡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향내 미천면 어옥리 선영 아래에 장사지냈다. 배 숙부인 해주정씨는 헌의(獻毅)의 딸로, 충의공 농포(農圃)의 후손이다. 갑진년(1784)에 태어나 경신년(1860) 3월 25일에 별세하였다. 공의 묘와 쌍분하였으며, 부덕(婦德)이 있었다. 아들은 의겸(義謙)이고, 사위는 진양 정유빈(鄭有贇)과 진양 강영규(姜永奎), 단양 우사헌(禹思憲)이다. 의겸의 아들은 한주(漢柱)이며, 사위 진주 하계성(河啓星)은 참봉이다.

 

아! 선생은 문헌이 있는 가문에서 생장하시여 천성이 총명하시고, 또한 부친의 훌륭하신 가르침을 입어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어 후진을 가르쳤도다. 한결같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실천하며, 몸가짐에 있어서는 매우 가난하더라도 영리(營利)나 부귀를 절대 도모하지 아니하시고 조용히 자숙하며 세속에 구애받지 아니하는 자세를 가졌으니, 참으로 어른이라고 이를 만 하도다.

 

공의 남긴 사적들은 영원히 변함없이 전해져야 할 것임에도 손자 한주 때에 이르러 살던 집에 화재가 일어나자 그 아내 유인 창녕성씨가 죽음을 무릅쓰고 불속에 뛰어 들어가 백패(白牌)와 교지(敎旨)를 수습하여 지금 것 가보로 전해오고 있으나, 그 나머지 남긴 저술과 유품은 불탔으니 후손들이 슬픔을 그치지 못하도다.

 

신사년(2001) 중춘일에 나의 벗 전 군수 이재을(李在乙)씨가 나에게 죽성(竹醒)공이 지은 전(傳)기문을 보이면서 “이것은 우리 고조님 행실의 대략으로 십여 년 전 경오년(1990) 정초에 삼형제가 고향에 모여 앉아 우리 고조의 사적비 세울 것을 서약하였으나’ 둘째 동생 재권(在權)은 당시 법관에서 퇴임하여 변호사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돌아가신지 몇 년 되었고, 나의 막내 동생 재수(在秀) 또한 고희를 넘음에 이 사정을 아는 향인들이 드무니 책임은 나에게 미루어졌습니다.

” 외손 정모(鄭大永)가 적극 부지를 제공한다하고 나에게는 비문을 청하기에 나는 사양하기 난감하여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답하고 명(銘)하여 짓기를,

 

타고난 성품 영리하여 부모의 가르침 받았네,

긴 밤 불 켜고 깊이 연구하고 돈독하게 배웠네,

문덕이 도동서원 원장에 천거되어 오랫동안 재임했네,

예를 매일 강론하여 많은 선비 모았네,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중암에 화답하였네,

왕의 은혜입어 효행으로 표창 받았네,

지리산으로부터 이어진 봉우리 월아산에 흘러와 응축됏네,

남강 길게 흘러 천년이 지나도 징험하리라.

 

 

 

서기 2001년 辛巳 淸明節(신사 청명절)

載寧 后人 李 秉熙 謹撰(재령 후인 이병희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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