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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부윤 이정 거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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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서원 안에는 「부윤구암선생비각(府尹龜巖先生碑閣)」이 세워져 있다. 이 비각 안에 있는 비(碑)를 거사비(去思碑)라 한다. 거사비는 구암선생(龜巖先生)이 경주 부윤(府尹)으로 재임하는 동안 어질게 밝히여 정사(政事)를 잘 베푼 수령의 대업(大業)을 기리고 이 일을 오래토록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 흠모(欽慕)하기 위하여 경주사람(邑人)들이 선조원년(宣祖元年)에 세웠다.

처음에는 비각이 있었다고 하나 오랜 세월에 씻기어 허물어졌던 것을 비(碑)를 서원 뜰 안으로 옮긴 이후 선생의 후손 백천 이기태(白泉 李起泰) 박사께서 경주시와 뜻있는 여러 인사들의 협조로 새로 비각(碑閣)을 세우고 단청(丹靑) 하였으니 지금은 고색(古色)이 완연(宛然)하여 옛 정취(情趣)가 한결 돋보이게 되었다. 거사비문은 아래와 같으니 450년이 지난 지금에도 후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비각의 현판은 1986년 저명한 서예가로 알려진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선생이 썼다.

 

부윤 구암선생비(府尹 龜巖先生碑)

先生 姓 李. 諱 楨. 字 剛而. 泗川人也

선생 성 이, 휘 정, 자 강이. 사천인야.

선생의 성은 이씨요. 이름은 정이며, 자는 강이로 사천사람이다.

嘉靖庚申九月下車庚亥正月留鞭土薰

가정경신구월하차경해정월유편사훈

1560년(명종 15년) 9월에 부임하고 1563년(명종 18년)

정월에 떠나니 사군의 훈공이 빛났어라.

其敎民恭, 其德吏亦服, 公淸愈, 久而愈不志, 嗚呼韙哉

기교민공 기덕리역복 공청유 구이유불지 오호위재

그의 가르침은 백성들의 공경을 받을만하고,

그의 덕은 향리들의 마음에 새겨 따를 만하니

공은 어질고도 청렴하여 오래오래 잊을 수 없으리.

오~ 거룩하여라.

 

隆慶元年十一月 日 立石

1568년 11월 비를 세우다.

 

 

구암선생이 별세하자 선조(宣祖)임금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에는 “…동도(東都; 현 경주)를 다스렸고 능원(陵園)을 봉수하였으니 이 또한 어진 이의 일이라”고 하였다. 또 1998년 9월 17일자 새마을운동신문 「향토인물 기행, 경주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오늘, 서라벌이 되살아나고 있다. 「새천년의 미소」 「98경주세계문화 EXPO」를 관람 온 구경객 들과 들뜬 거리가 온통 잔치물결로 술렁인다.” “천년의 도읍지 경주는 오늘 다시 천년의 역사를 더하며 찬란했던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경주를 되살리는데 전환점을 마련했던 인물은 조선시대 학자 구암 이정(李楨;1512~ 1571) 선생과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은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며 풍속이 문란하여 역대 여러 임금의 왕릉이 허물어진 채 곳곳이 논밭으로 변해 있었다. 왕릉의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주춧돌로 쓰고 있는지라…’ 이에 분개한 구암선생은 즉시 능묘를 봉수하였으며 무열왕능과 김유신 장군의 묘에 제사를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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