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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옥천정사와 옥천서원
옥천서원
구암선생(龜巖先生)이 순천부사(順天府使 : 1563년 11월~1566년 4월)로 부임(赴任)하여 옥천정사(玉川精舍)를 지어 남도(南道)의 사자(士子)들로 하여금 공부하게 하였으며 호남(湖南)에서 처음으로 서원을 세워 선현을 받들어 향사(享祀)하는 법도와 미풍양속을 전함은 물론 지방학관으로 모범을 보인 곳이 옥천서원(玉川書院)이다.
순천 땅은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과 매계 조위(梅溪 曺衛) 두 선생이 무오사화에 연루(連累)되어 귀양살던 곳으로 서성(西城) 옥천(玉川) 강변에 유적지가 있다. 구암이 처음 이곳에 있는 유적지인 임청대(臨淸臺)를 찾아 경현당(景賢堂)을 세우고 한훤당(寒暄堂)의 유영(遊靈)을 봉안 향사(享祀)하였으니 한훤당이 여기서 사약(死藥)을 받은지 60년만의 일이다. 경현당기, 경현록, 임청대비문 등이 있다.
1564년(명종 19)에 건립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되었으며, 1597년에 소실되었다가 1604년 허건(許鍵)·심윤(沈玧)·정지추(鄭之推)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동 165번지에 위치하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1565년 옥천정사를 당시 경현당의 오른편에 자리를 정하였는데 그 땅이 민간인의 소유였으므로 관전(官田)을 주고 대토(代土)하였다. 조선시대의 토지문제는 오늘날 왕토사상(王土思想)과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다.∙
·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 이조 성종(成宗) 때의 학자이다. 처음에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우고 육경(六經)을 연구하며 학문이 매우 높았으며 연산조(燕山朝)에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있을 때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에 관련되어 귀양(歸鄕) 갔다가 뒤에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가 일어나 전일(前日)의 사류(士類)들을 죽일 때 순천 땅에서 사약(死藥)을 받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 : 1506) 이 후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고 광해군(光海君 : 1610)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문하에는 조광조(趙光祖), 김정국(金正國), 이장곤(李長坤) 등이 있다.
· 조위(曺偉 : 생몰시당) : 성종(成宗)때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성종의 명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편집할 때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 초나라 의제를 조상하는 글)을 문집의 첫머리에 쓴 것이 탓이 되어 무오사화의 화근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순천 땅에서 귀양 살았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웅려하였으며 많은 문사(文士)를 배출하였다.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이며 성리학자 환원당 "김광필"이 순천에서 귀양살이하다 세상을 뜨자. 그"학덕"을 기리기 위해 순천 부사 이신 이정선생(1563.11~1566.4 52세~55세)이 지은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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