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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석간대(石澗臺)

 

구암선생(龜巖先生)이 1562년 경주부윤(慶州府尹) 재임 시에 잠시 여가를 내어서 도산(陶山)을 찾아 3일을 머물고 간곡(懇曲)한 정을 다하지 못한 채 헤어지는 날에 퇴계(退溪)가 아쉬움을 못다 하여 옛 당인(唐人)의 시(詩)를 읊어 이날의 전별(餞別)을 오랫토록 기념(記念)하기 위하여 계곡(溪谷) 암벽(岩壁)에 글을 새겼는데 이를 석간대(石澗臺)라고 하며, 동구(洞口)밖 10리터에 석간대라는 돌비가 지금도 서 있다.

1595년 2월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단을 쌓고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본래의 석간대는 1976년 안동댐 수몰로 물속에 잠기게 되었고 안동댐 수몰 직전인 1974년에 본래의 석간대를 탁본해서 현재의 바위에 다시 새겨 놓은 것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79-2번지(도산서원길 154)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강 쪽으로 거의 내려가서 오른편으로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면 있다. 아래는 퇴계(退溪)선생이 읊은 당인(唐人)의 시(詩)와 구암(龜巖)선생이 읊은 답시(答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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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대 원형

 

퇴계선생 송별시(送別詩)

君去春山誰共遊 鳥啼花落水空流 군거춘산수공유 조제화락수공류

今朝送別臨溪水 他日相思來水頭 금조송별임유수 타일상사래수두

그대 떠난 봄 동산에 누구랑 같이 놀고, 새 울고 꽃 지는데 물만 홀로 흐르네.

이 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 이다음 그리워 생각나면 이 물가에 다시 오리.

 

구암선생 답시(答詩)

啿歎何年續此遊 一春心事碧江流 담탄하년속차유 일춘심사벽강류

澗邊送別丁寧語 追億令人白盡頭 간별송별정영어 추억영인백진두

아쉬움을 참을세라 어느 해에 다시 벗할거나,

이 한봄에 그리움은 푸른 강물 따라 흐르고

시냇가에서 떠나는 이 보내며 친절한 말씀,

지난날 돌이키면 어진 분 백발이 성성하리라.

 

 

(1) 석간대(石澗臺) 이별시 원형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옛길로 내려가 보면 오른쪽 산자락 끝에 ‘석간대’라고 새겨진 비석 하나가 풍상에 닳은 채 서 있고, 산허리엔 커다란 바위가 소나무를 의지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가정임술(1562년) 3월에 퇴계선생이 구암선생을 송별한 자리에서 당나라 시 한수를 써서 이별의 정을 나타내었는데, 그 때 써 준 시와 사연을 을미(1595년) 2월에 바위에 새겼다. 지금 이 각석은 처음 새겨진 것이 아니고 구각이 물에 잠기게 되어 본석간대 원형 을 떠서 여기에 옮겨 새겼다고 한다. 비록 원석을 보지 못하지만, 노 선생의 구암선생 사랑이 잔잔한 감동으로 밀려온다. 바닥을 70×115㎝정도 고르고 글이 새겨져 있는데 글의 내용으로 보면 한시부분은 퇴계선생의 글이고, 사연을 나타낸 부분은 이 글을 돌에 올린 제자의 글이다.

 

此唐人絶句也/嘉靖壬戌三月/老先生送別李龜巖於此臺/書此詩以贈行/乙未

二月/舊刻在石澗巖/石入於水沒 苡摹而移刻

 

이는 당인의 절구이다.[唐人絶句: 당나라 시대 유상(劉商)의 송왕영(送王永)이라는 詩]

가정임술(1562년) 3월에 노선생이 이구암을 이 대(臺)에서 송별하면서 이 시를 써서 갈 때 준 것이다. 을미(1595년) 2월에 이 시를 새긴 것이 석간암(石澗巖) 돌에 있던 것인데 수몰되면서 이것을 그대로 본을 떠서 옮겨 새겼다.

 

1974년 안동댐 조성으로 인해 수몰돼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원(元) 석간대(石澗臺) 비문이 2006년 11월 8일 발견된 바 있다. 이 비문은 서원(書院)주변 환경을 정비하던 도산서원관리사무소 관계자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석간대(사진의 좌상단)는 원석간대(사진의 우하단 일하는 곳)로부터 약 10m 정도의 언덕에 조성하였고 당시 비문을 탁본하여 새겨 둔 것이다. 한편 안동시는 석간대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흙으로 다시 덮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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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대 원형 주변 환경

 

(2) 석간대의 숨은 이야기

「퇴계집」에는 (퇴계가) 구암에게 보낸 서신이 86편이 실려 있다. 이 서신들은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를 방증하는 자료들이기도 하다. 이 서신들 가운데 퇴계 후손인 이만도(李晩燾)가 지적한 바를 따라 두 편만 골라 얽힌 사연을 따라가 보자.1562년 봄에 경주부윤으로 재임 중이던 구암은 퇴계를 찾아가서 사흘을 머무르고, 도산을 떠나 예안현 객사에서 하룻밤 유숙한다. 작별한 다음날 아침 퇴계는 안부 겸 이별의 회포를 가득 담은 편지 한 통을 객사로 보낸다.

 

“밤사이 안부는 어떠하신지요? 삼일 동안 함께한 기쁨만으로 천리 먼 길을 달려오신 뜻을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별 후 아득하기만 하여 마음 가눌 길 없으나 가시는 동안 보중하시기 기원하며 밝은 덕을 더욱 쌓아 병든 친구의 바램에 부응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님 떠난 봄산을 뉘와 함께 노닐까? 꽃 지고 새 울고 물만 흐르네. 이날에 시냇가서 님 보내오니, 님 생각 다시 나면 이 물가에 오리라.’

 

처음 석간대에서 이별의 회포를 시로 읊으려 하였는데 우연히 당인(唐人)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오늘의 일을 다 말하고 있어 더 보탤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이 시만 적어 가시는 길에 보내오니 거두시기 바랍니다.

”62세의 퇴계는 아쉬움이 절절한 이 편지를 막 길 떠난 51세의 구암에게 보냈다. 이별의 애수가 독자를 뭉클하게 하는 인용시는 당나라 대력연간의 시인 유상(劉商)의 「송왕영(送王永)」이란 작품이다. 그러나 심부름꾼이 이 편지를 가지고 예안 현아(縣衙)에 도착하였을 때 구암은 이미 떠난 뒤였다. 심부름꾼은 빈손으로 돌아온다. 퇴계가 몹시 아쉬워하고 있을 즈음에 구암은 뒤늦게 이 편지를 보고 답신을 보낸다. 원시(原詩)에 차운한 시 한 수와 술 한 병을 곁들여서. 아직도 이별의 회포를 가누지 못하고 있던 퇴계는 반가웠다. 자신만 반가운 것이 아니라 산 속의 꽃과 새도 함께 환희에 젖는 듯하다. 보내준 술은 이문량(李文樑, 1498~1581)과 함께 이별 뒤의 우울함을 달래며 마신다. 퇴계는 이 기쁨과 다시 솟아오르는 그리움으로 그 옛날 주자(朱子)의 일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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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62세때 제자 이정선생이 "도산서원"에서 사흘동안 머물다 떠날적에 석별의 아쉬움을 잘 표현한 당나라 시인 "육상"의 시를 인용하여 읊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단을 쌓고, 바위에 "시"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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