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별 문중 종친회

HOME > 파별 문중 종친회

(각 종파별 문중 종친회는 다음의 해당 파를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 8. 선무랑공파 문중

 

1) 파조 및 세거지

11세조 휘 근(根, 1530년대)은 자는 자회(字晦), 관(官)은 선무랑(宣務郎)에 이르렀으며, 선무랑공파의 파조이시다. 할아버지는 휘 이창(以昌)으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이며, 아버지는 휘 두(斗)로 성균진사이며 형은 휘 번(藩)으로 성균진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公)의 성품은 온화독실하고 조취문사(早就文詞)하여 재종형제인 구암선생 휘 정(楨)과 더불어 자주 상자(相資; 서로 도움)하여 도의(道義)를 탁마(琢磨; 닦음)하니 시인(時人; 그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로 또한 큰 별과 작은 별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공의 자취는 불후(不朽;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음)할 것이며, 빛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모(晩募; 늘그막)에 곤양현 송비산(松飛山) 아래 성방(城方)에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 하나를 짓고 후생을 계도하니 성취한 자 많았다. 공(公)의 후손은 대를 이어 귀인이 출현하여 그 수가 또한 적지 않았으니 후인은 공의 유덕(遺德)을 입음이라 하였다.

 

공의 후손은 사천에서 곤명으로 곤명에서 하동 진교로 세장지를 옮겨 이곳을 인근하여 고룡, 양포, 금남, 횡천, 남해의 고현, 남원과 순천 그리고 하동읍에 세거하고 있었으며, 근래에는 서울, 부산, 진주, 거제, 삼천포 등지에 2대계 다섯 소문중의 자손들이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2) 선조 재실

(1) 휘 인발(仁潑)조(祖) 문중

파조이신 11세조 선무랑공 휘 근(根)의 아들은 12세조 휘 영(英)으로 자(字)는 춘배(春培)이고 군기시(軍器寺; 병기에 대한 행정을 맡은 관청)의 주부(主簿)이며, 그의 아들 13세조 휘 득선(得善)의 자(字)는 이서(以瑞)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이어서 통정대부의 아들은 14세조 두 분으로 장자는 휘 인발(仁潑, 1636∼1701)이고 자(字)는 사함(士涵)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이고 차자는 휘 의백(義白)이다. 휘 인발(仁潑)조(祖) 문중의 자손으로 23세손 종춘(鍾春, 1959∼)은 공학박사이고, 22세손 팔성(八成, 1944∼)의 보명은 덕환(德煥)이며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을 역임한 바가 있다. 선조의 제사는 부산에서 모시고 있다.

 

(2) 휘 의백(義白)조(祖) 문중 재실현황

재실명칭

영성재(永誠齋)

문 중 명

선무랑공파 의백조 문중

소재지

경남 하동군 진교면 구곡1길 8 (고룡리 108-1)

토지면적

294㎡

건물면적

54.55 ㎡

구조

목조 슬레이트

건축년도

1932년

소유명의

영성재(永誠齋)

대 표 자

22세 이용현

비고

재실로 사용하기 시작한 년도 : 1967년

 

선무랑공의 증손되는 14세조 휘 의백(義白, 1639∼미상)의 자(字)는 사성(士成)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종4품)이 되었다. 첨정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무장다운 기백과 위엄이 있었으며 학문 또한 사군(師君;스승)될 만 하였고 지극한 효성과 우애로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 사당으로 하동 진교 고룡리에 있으며 공(公)의 후손들이 마음을 합하여 재실(齋室)을 세웠다. 공(公)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첨정(僉正)에 오르고 학문을 닦아 성품(性品)이 깨끗하였으며 효제(孝悌)함을 도리로 삼아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을 널리 드높인 분으로 족손(族孫) 경환(璟煥)이 기문(記文)을 썼다

 

 

(각 종파별 문중 종친회는 다음의 해당 파를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 8. 선무랑공파 문중

 

1) 파조 및 세거지

11세조 휘 근(根, 1530년대)은 자는 자회(字晦), 관(官)은 선무랑(宣務郎)에 이르렀으며, 선무랑공파의 파조이시다. 할아버지는 휘 이창(以昌)으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이며, 아버지는 휘 두(斗)로 성균진사이며 형은 휘 번(藩)으로 성균진사공파의 파조이시다. 공(公)의 성품은 온화독실하고 조취문사(早就文詞)하여 재종형제인 구암선생 휘 정(楨)과 더불어 자주 상자(相資; 서로 도움)하여 도의(道義)를 탁마(琢磨; 닦음)하니 시인(時人; 그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로 또한 큰 별과 작은 별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공의 자취는 불후(不朽;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음)할 것이며, 빛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모(晩募; 늘그막)에 곤양현 송비산(松飛山) 아래 성방(城方)에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 하나를 짓고 후생을 계도하니 성취한 자 많았다. 공(公)의 후손은 대를 이어 귀인이 출현하여 그 수가 또한 적지 않았으니 후인은 공의 유덕(遺德)을 입음이라 하였다.

 

공의 후손은 사천에서 곤명으로 곤명에서 하동 진교로 세장지를 옮겨 이곳을 인근하여 고룡, 양포, 금남, 횡천, 남해의 고현, 남원과 순천 그리고 하동읍에 세거하고 있었으며, 근래에는 서울, 부산, 진주, 거제, 삼천포 등지에 2대계 다섯 소문중의 자손들이 당당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2) 선조 재실

(1) 휘 인발(仁潑)조(祖) 문중

파조이신 11세조 선무랑공 휘 근(根)의 아들은 12세조 휘 영(英)으로 자(字)는 춘배(春培)이고 군기시(軍器寺; 병기에 대한 행정을 맡은 관청)의 주부(主簿)이며, 그의 아들 13세조 휘 득선(得善)의 자(字)는 이서(以瑞)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이어서 통정대부의 아들은 14세조 두 분으로 장자는 휘 인발(仁潑, 1636∼1701)이고 자(字)는 사함(士涵)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이고 차자는 휘 의백(義白)이다. 휘 인발(仁潑)조(祖) 문중의 자손으로 23세손 종춘(鍾春, 1959∼)은 공학박사이고, 22세손 팔성(八成, 1944∼)의 보명은 덕환(德煥)이며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을 역임한 바가 있다. 선조의 제사는 부산에서 모시고 있다.

 

(2) 휘 의백(義白)조(祖) 문중 재실현황

재실명칭

영성재(永誠齋)

문 중 명

선무랑공파 의백조 문중

소재지

경남 하동군 진교면 구곡1길 8 (고룡리 108-1)

토지면적

294㎡

건물면적

54.55 ㎡

구조

목조 슬레이트

건축년도

1932년

소유명의

영성재(永誠齋)

대 표 자

22세 이용현

비고

재실로 사용하기 시작한 년도 : 1967년

 

선무랑공의 증손되는 14세조 휘 의백(義白, 1639∼미상)의 자(字)는 사성(士成)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종4품)이 되었다. 첨정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무장다운 기백과 위엄이 있었으며 학문 또한 사군(師君;스승)될 만 하였고 지극한 효성과 우애로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 사당으로 하동 진교 고룡리에 있으며 공(公)의 후손들이 마음을 합하여 재실(齋室)을 세웠다. 공(公)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첨정(僉正)에 오르고 학문을 닦아 성품(性品)이 깨끗하였으며 효제(孝悌)함을 도리로 삼아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을 널리 드높인 분으로 족손(族孫) 경환(璟煥)이 기문(記文)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