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별 문중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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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 5. 우소재공파 문중

 

1) 파조 및 세거지

13세손 호변(虎變)의 자는 자무(子茂), 호는 우소재(迂疎齋)로 사천(동성)이씨를 중흥(中興) 시킨 구암 휘 정(楨)선조의 장손이며, 6세조 교도공(敎道公) 휘 자(稵) 현손(玄孫)이시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進士試)에 아우 곤변(鯤變)과 함께 연방(聯榜)하여 조부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학문을 잘하여 명예를 얻었고, 관직에 나아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지냈다. 호변(虎變)조는 임진왜란 때 아우 곤변(鯤變)과 함께 나라에 공을 세워 녹권(錄卷)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오르고, 사천이씨 우소재공파(迂疎齋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산소는 양위분 함께 선영(先塋)인 진주 정촌면 대축리의 대동산 경좌(庚坐).

 

아들 14세손 종일(從一) 또한 정훈(庭訓)에 따라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뒤에 문행(文行)으로 당세에 이름을 떨쳤고, 향당(鄕黨)에서 효문인(孝門人)이라 칭송받았을 뿐더러 참봉(叅奉)으로 천거되었다. 파조의 사위인 오장(吳長)은 함양인으로 명종 때 문신(文臣), 학자인 덕계(德溪) 오건(吳建)선생의 아들이다.

이후 파조 우소재공(迂疎齋公)의 후예들은 4백여 년전 진주 땅에서 다시 환향(還鄕), 정동 대산(垈山)에 이거(移居)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대산을 비롯해 예수, 가곡 등지에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지금까지 12대째 세거해 왔으니 손세(孫勢)는 80여 호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대 변천에 따라 대부분의 후손들이 연고지를 떠나 경향(京鄕) 각지에 거주하고 있다.

 

2) 재실

15세조이신 참판공(參判公) 휘 연(淵 : 백인재공의 후)과 16세조이신 참봉(參奉) 휘 륵(玏 : 우소재공의 후) 조의 재실(齋室)이 합천 봉산 양지리(陽地里)에 있었다. 양위(兩位)분은 성품이 순후(純厚)하여 재질(才質)이 뛰어났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효우(孝友)를 본(本)으로 공경(恭敬)함에는 진심(眞心)을 다하였고 착하고 어짐을 사람의 도리(道理)로 삼았다. 후손 홍익(洪瀷)이 기문(記文)하고 수현(壽賢)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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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 5. 우소재공파 문중

 

1) 파조 및 세거지

13세손 호변(虎變)의 자는 자무(子茂), 호는 우소재(迂疎齋)로 사천(동성)이씨를 중흥(中興) 시킨 구암 휘 정(楨)선조의 장손이며, 6세조 교도공(敎道公) 휘 자(稵) 현손(玄孫)이시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進士試)에 아우 곤변(鯤變)과 함께 연방(聯榜)하여 조부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학문을 잘하여 명예를 얻었고, 관직에 나아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지냈다. 호변(虎變)조는 임진왜란 때 아우 곤변(鯤變)과 함께 나라에 공을 세워 녹권(錄卷)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오르고, 사천이씨 우소재공파(迂疎齋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산소는 양위분 함께 선영(先塋)인 진주 정촌면 대축리의 대동산 경좌(庚坐).

 

아들 14세손 종일(從一) 또한 정훈(庭訓)에 따라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뒤에 문행(文行)으로 당세에 이름을 떨쳤고, 향당(鄕黨)에서 효문인(孝門人)이라 칭송받았을 뿐더러 참봉(叅奉)으로 천거되었다. 파조의 사위인 오장(吳長)은 함양인으로 명종 때 문신(文臣), 학자인 덕계(德溪) 오건(吳建)선생의 아들이다.

이후 파조 우소재공(迂疎齋公)의 후예들은 4백여 년전 진주 땅에서 다시 환향(還鄕), 정동 대산(垈山)에 이거(移居)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대산을 비롯해 예수, 가곡 등지에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지금까지 12대째 세거해 왔으니 손세(孫勢)는 80여 호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대 변천에 따라 대부분의 후손들이 연고지를 떠나 경향(京鄕) 각지에 거주하고 있다.

 

2) 재실

15세조이신 참판공(參判公) 휘 연(淵 : 백인재공의 후)과 16세조이신 참봉(參奉) 휘 륵(玏 : 우소재공의 후) 조의 재실(齋室)이 합천 봉산 양지리(陽地里)에 있었다. 양위(兩位)분은 성품이 순후(純厚)하여 재질(才質)이 뛰어났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효우(孝友)를 본(本)으로 공경(恭敬)함에는 진심(眞心)을 다하였고 착하고 어짐을 사람의 도리(道理)로 삼았다. 후손 홍익(洪瀷)이 기문(記文)하고 수현(壽賢)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