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별 문중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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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 6. 백인재공파 문중

 

1) 파조 및 세거지

13세손인 휘 곤변(鯤變)은 사천(동성)이씨의 현조(顯祖)이신 구암선생의 차손(次孫)으로 자는 자거(子擧)이며 호는 백인재(百忍齋)로 백인재공파의 파조이다. 구암선생의 사려(思慮)가 많았던 애중지손(愛重之孫)으로 일찍이 그는 형 호변(虎變)과 나란히 을묘진사시(乙卯進士試)에 동방(同榜)하여 삼천진(三千鎭, 지금의 삼천포) 권관(權官)을 지냈으며, 왜란 때는 형 우소재공과 더불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무공을 세웠으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녹권(錄卷)에 책록되었다. 그는 기절(氣節)이 웅위(雄偉)하고 사리(事理)에 밝은 걸출(傑出)로 문사(文詞)에 능하고 반궁(泮宮, 성균관)에 유학하여 당세에 명성을 떨쳤다.

일찍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선조 때 相臣)을 섬겼는데 오리께서는 백인재를 가리켜 뛰어남이 있는 남도(南道)의 인물이라 칭찬하였으며, 또한 많은 문집(文集)을 남겼으나 세전하는 것은 오로지 의와졸변(疑訛拙辯) 한 권이 있을 뿐이다. 파조 묘소는 축동면 탑곡(塔洞) 임좌(壬坐)에 있으며, 숙부인(淑夫人) 진주하씨(晋州河氏 : 雲水堂 潤의 玄孫女)의 묘는 정동 감곡(甘谷)에 있다.

 

파조께서는 네분의 아들을 두었는데 제1자인 대일(大一, 14세)의 자는 통지(通之)이며 호는 만각재(晩覺齋)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으며, 경종조(景宗朝) 진사까지 지냈으나 불행히도 조졸(早卒)하여 당세 사우지간(士友之間)에 애석하게 여긴 인물이다. 일찍이 사천의 관아인 헌공청 상량문(憲功廳上樑文)을 지었는데 한 구절에서 “대들보 남쪽은 동성(사천)의 기이한 국면을 어찌 감탄하지 않으랴. 이구산(尼丘山)을 우러러보니 옛 성인(聖人)의 자취가 생각나고 사수강(泗水江) 물가에 다다라 참다운 근원을 느끼노라”고 하였다. 제2자인 차일(次一)은 어모장군 행남촌진첨사(禦侮將軍行南村鎭僉使)를 지냈고, 제3자인 협일(協一)은 무과(武科)에 올랐다.

 

15세손 윤(綸)은 파조의 직손으로 송림참봉(松林叅奉), 16세손 은손(恩孫)은 파조의 증손이니 구암선생의 5세손인 즙(緝)의 아들이다. 그는 지효지성(至孝至誠)을 타고나서 어버이를 잘 봉양하더니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주야로 슬피 울었는데, 여름철이라 일손이 텅 빈 마을에서 갑자기 화재가 나서 불길이 부친의 관(棺)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는 힘이 약해 시신(屍身)을 구할 수가 없는지라 급히 불속에 뛰어들어 널을 안고 함께 타 죽고자 하니 맑던 하늘이 갑작스레 검게 변하여 소낙비가 크게 쏟아져 불길을 잡으니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모두 온전하여 무사히 장사를 치렀다. 또 아래에 여막(廬幕)을 치고 3년을 시묘(侍墓)했는데 뒤에 이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저 정려(旌閭)가 내렸다. 이 사실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20세손 정언(廷彦)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였고, 21세손 태석(泰錫)의 자는 극천(極天)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23세손 광율(光律)의 자는 여성(汝聖)이고 호는 초은(樵隱)이며 백인재공의 직계손이다. 그는 가선 태석의 아들 순종(順宗)이 아버지 되시고 김해김문(金海金門)에 통정(通政) 진수(進守)의 딸이 어머니 되신다. 친외 양가(親外兩家)가 모두 명문으로 세덕(世德)과 가범(家範)에 있어서 은의(恩義)를 중히 숭상하였으며, 그의 할고사친(割股事親 :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 어버이를 섬김)은 일찍부터 향리의 칭송이 많았다. 고종 병인년(丙寅年 : 1866) 4월에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고을 사람들이 이효자(李孝子)의 상사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조상(弔喪)하고 불식불음(不食不飮)하며 호곡(號哭)하는 이도 있었다.

 

2) 선조 재실

(1) 경덕재(敬德齋)

재실명칭

경덕재(敬德齋)

문 중 명

백인재공파

소재지

합천 봉산면 양지리 465-1번지

토지면적

275㎡

건물면적

68.2㎡

구조

블록 강판기와

건축년도

2012

소유명의

 

대 표 자

25세 이용수

비고

 

 

(2) 경모재(敬慕齋)

재실명칭

경모재(敬慕齋)

문 중 명

백인재공파

소재지

합천 봉산면 양지리 488번지

토지면적

218㎡

건물면적

㎡ 약 20평

구조

목조기와

건축년도

 

소유명의

 

대 표 자

25세 이염도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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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첨정공파  

우소재공파

백인재공파

성균진사공파

선무랑공파

생원공파 

 

iq06.png 6. 백인재공파 문중

 

1) 파조 및 세거지

13세손인 휘 곤변(鯤變)은 사천(동성)이씨의 현조(顯祖)이신 구암선생의 차손(次孫)으로 자는 자거(子擧)이며 호는 백인재(百忍齋)로 백인재공파의 파조이다. 구암선생의 사려(思慮)가 많았던 애중지손(愛重之孫)으로 일찍이 그는 형 호변(虎變)과 나란히 을묘진사시(乙卯進士試)에 동방(同榜)하여 삼천진(三千鎭, 지금의 삼천포) 권관(權官)을 지냈으며, 왜란 때는 형 우소재공과 더불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무공을 세웠으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녹권(錄卷)에 책록되었다. 그는 기절(氣節)이 웅위(雄偉)하고 사리(事理)에 밝은 걸출(傑出)로 문사(文詞)에 능하고 반궁(泮宮, 성균관)에 유학하여 당세에 명성을 떨쳤다.

일찍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선조 때 相臣)을 섬겼는데 오리께서는 백인재를 가리켜 뛰어남이 있는 남도(南道)의 인물이라 칭찬하였으며, 또한 많은 문집(文集)을 남겼으나 세전하는 것은 오로지 의와졸변(疑訛拙辯) 한 권이 있을 뿐이다. 파조 묘소는 축동면 탑곡(塔洞) 임좌(壬坐)에 있으며, 숙부인(淑夫人) 진주하씨(晋州河氏 : 雲水堂 潤의 玄孫女)의 묘는 정동 감곡(甘谷)에 있다.

 

파조께서는 네분의 아들을 두었는데 제1자인 대일(大一, 14세)의 자는 통지(通之)이며 호는 만각재(晩覺齋)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으며, 경종조(景宗朝) 진사까지 지냈으나 불행히도 조졸(早卒)하여 당세 사우지간(士友之間)에 애석하게 여긴 인물이다. 일찍이 사천의 관아인 헌공청 상량문(憲功廳上樑文)을 지었는데 한 구절에서 “대들보 남쪽은 동성(사천)의 기이한 국면을 어찌 감탄하지 않으랴. 이구산(尼丘山)을 우러러보니 옛 성인(聖人)의 자취가 생각나고 사수강(泗水江) 물가에 다다라 참다운 근원을 느끼노라”고 하였다. 제2자인 차일(次一)은 어모장군 행남촌진첨사(禦侮將軍行南村鎭僉使)를 지냈고, 제3자인 협일(協一)은 무과(武科)에 올랐다.

 

15세손 윤(綸)은 파조의 직손으로 송림참봉(松林叅奉), 16세손 은손(恩孫)은 파조의 증손이니 구암선생의 5세손인 즙(緝)의 아들이다. 그는 지효지성(至孝至誠)을 타고나서 어버이를 잘 봉양하더니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주야로 슬피 울었는데, 여름철이라 일손이 텅 빈 마을에서 갑자기 화재가 나서 불길이 부친의 관(棺)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는 힘이 약해 시신(屍身)을 구할 수가 없는지라 급히 불속에 뛰어들어 널을 안고 함께 타 죽고자 하니 맑던 하늘이 갑작스레 검게 변하여 소낙비가 크게 쏟아져 불길을 잡으니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모두 온전하여 무사히 장사를 치렀다. 또 아래에 여막(廬幕)을 치고 3년을 시묘(侍墓)했는데 뒤에 이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저 정려(旌閭)가 내렸다. 이 사실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20세손 정언(廷彦)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였고, 21세손 태석(泰錫)의 자는 극천(極天)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23세손 광율(光律)의 자는 여성(汝聖)이고 호는 초은(樵隱)이며 백인재공의 직계손이다. 그는 가선 태석의 아들 순종(順宗)이 아버지 되시고 김해김문(金海金門)에 통정(通政) 진수(進守)의 딸이 어머니 되신다. 친외 양가(親外兩家)가 모두 명문으로 세덕(世德)과 가범(家範)에 있어서 은의(恩義)를 중히 숭상하였으며, 그의 할고사친(割股事親 :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 어버이를 섬김)은 일찍부터 향리의 칭송이 많았다. 고종 병인년(丙寅年 : 1866) 4월에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고을 사람들이 이효자(李孝子)의 상사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조상(弔喪)하고 불식불음(不食不飮)하며 호곡(號哭)하는 이도 있었다.

 

2) 선조 재실

(1) 경덕재(敬德齋)

재실명칭

경덕재(敬德齋)

문중명

백인재공파

소재지

합천 봉산면 양지리 465-1번지

토지면적

275㎡

건물면적

68.2㎡

구조

블록 강판기와

건축년도

2012

소유명의

 

대표자

25세 이용수

비고

 

 

(2) 경모재(敬慕齋)

재실명칭

경모재(敬慕齋)

문중명

백인재공파

소재지

합천 봉산면 양지리 488번지

토지면적

218㎡

건물면적

㎡ 약 20평

구조

목조기와

건축년도

 

소유명의

 

대표자

25세 이염도

비고